베트남전쟁에서는 개똥도 무기로 사용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개똥도 무기로 사용했다.

오는 2월말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차 북미정상회담의 장소 중 한 곳으로 거론되고 있는 베트남은 오랜 기간 미국과 전쟁을 치렀고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트남공산주의자(Vietnamese Communists)라는 의미를 갖는 Viet Nam Cong San을 줄여서 부르는 베트콩(Viet Cong)은 미군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무장으로 인해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그 중의 하나로 ‘펀지 스틱(punji stick)’이라고 하는 죽창을 이용한 부비트랩을 많이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베트콩은 ‘펀지 스틱(punji stick)’에 똥을 발라놓아 죽창에 찔리는 부상 외에도 세균감염으로 인한 피해를 유발하도록 했는데 실제 이로 인해 미군이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Source: Tyler/Booby trap at the Cu Chi Tunnels

 

똥을 무기로 사용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16년에 일어난 벨기에 브뤼셀 폭탄테러를 꼽을 수 있는데 2017년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용의자 모하메드 아브리니(Mohamed Abrini)가 사용한 폭탄에도 동물의 고환(animal testes)과 똥(fecal matter)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미군도 베트남전쟁에서 “T-1151 Dog Doo”라고 하는 외형이 개똥과 비슷한 형태의 송신기를 사용했는데 베트콩이 병력과 군수품을 이동하던 경로인 호치민 트레일(호치민 루트)에 비행기로 투하하여 진동을 감지하면 VHF RF 신호를 300~400m의 범위에 숨겨놓은 수신기에 보내도록 하여 움직임을 파악하였다고 합니다.

Source: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이런 “T-1151 Dog Doo”는 형태가 원숭이 똥과도 닮았다고 해서 ‘Monkey Turds’라고도 불리었으며 동물의 배설물로 인식한 베트콩들이 크게 경계를 하지 않아 효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미국 해병대가 계획했던 스케이트보드 부대

미국 해병대가 계획했던 스케이트보드 부대

1990년대 미해병전투연구소(Marine Corps Warfighting Laboratory)에서는 시가전에 대비할 목적으로 ‘Operation Urban Warrior’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우리에게는 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잘 알려진 소말리아 민병대와 치른 ‘모가디슈 전투’가 일어났고 이에 해병당국에서는 ‘Operation Urban Warrior’ 프로그램을 앞당겨 실시하였습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이런 프로그램의 결과로 개발했던 것으로는 T자 문양의 패턴이 들어간 전투복(BDU: Battle Dress Uniform)도 있었으나 채택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이 글의 제목과 같이 스케이트보드를 사용하는 부대를 만들어 운용한다는 전술적인 테스트를 실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스케이트보드를 시가전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목적 중에서 건물 내에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트립와이어(tripwire)를 탐지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또 다른 목적인 적의 저격수를 탐지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진 않지만, 뭐 그렇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테스트를 위하여 개발한 T자 문양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시중에서 판매하는 스케이트 보드를 구입하여 도색을 한 다음 들고 있는 챠드 코드웰(Chad Codwell) 일병의 사진이 1999년 3월에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스케이트보드를 시가전에 사용하려던 계획은 중단되었고 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무릎과 팔꿈치보호대(knee and elbow pads)가 시가전에서 크게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 개선하게 되는 동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웨덴 최초의 후퇴익 전투기, 사브 29 투난

스웨덴 최초의 후퇴익 전투기, 사브 29 투난

스웨덴의 전투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사브 JAS 39 그리펜일 것이다. JAS는 스웨덴어로 전투기(Jakt), 공격(Attack), 정찰(Spaning)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고 뒤에 있는 그리펜은 별명으로 붙인 것이다.

사브가 생산한 대표적인 전투기로는 39 그리펜을 비롯하여 35 드라켄 및 37 비겐 등이 대표적인데 이 전투기들의 별명은 모두 강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스웨덴어로 드라켄(Draken)은 용을 뜻하는 드래곤(Dragon)이고, 비겐(Viggen)은 벼락을 뜻하는 썬더볼트(Thunderbolt), 그리펜(Gripen)은 영어로는 그리핀(Griffin)이라고 하는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상상의 동물을 뜻한다.

사브 JAS 39 그리펜

 

사브 J 35 드라켄

 

사브 JA 37 비겐

 

그런데 이와는 달리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한 별명이 붙은 스웨덴의 전투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으로 스웨덴어 튜난(Tunnan)은 영어로는 통을 뜻하는 배럴(Barrel)을 의미한다.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사브 21R(Saab 21R)에 이은 스웨덴의 2번째 제트 전투기였지만 그보다는 서유럽 최초의 후퇴익(swept wing)기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기종이다.

날개의 끝이 꼬리방향으로 뒤를 향하고 있는 최초의 전투기는 독일의 메서슈미트Me 262(Messerschmitt Me 262)였는데 세계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던 메서슈미트Me 262는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투입되었더라면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인데 이 전투기가 채택한 것이 바로 기존의 전투기와는 다른 후퇴익(swept wing)이었다.

아돌프 부제만(Adolf Busemann)

 

지금은 거의 모든 항공기들이 채택하고 있는 후퇴익(swept wing)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독일인 아돌프 부제만(Adolf Busemann)으로 1935년 로마에서 열렸던 볼타 컨퍼런스에서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극비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프로토 타입의 메서슈미트 Me P.1101(Messerschmitt Me P.1101)과 2차 대전 중에 1,400대 이상이 생산되었던 메서슈미트Me 262(Messerschmitt Me 262)였다.

메서슈미트 Me P.1101

 

메서슈미트Me 262

 

한편 2차 대전 중에 미국은 러스티 작전(Operation LUSTY)이란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독일의 항공기와 그에 관한 제작기술 및 연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축적된 독일의 기술을 빼내기 위해 더욱 열심이었고 그렇게 해서 습득한 기술의 하나가 바로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것이었다.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정보와 기술은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도 공유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후퇴익기의 대표적인 것들로는 미국의 F-86 세이버, 영국의 호커 헌터(Hawker Hunter) 및 소련의 MiG-15와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인 스웨덴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 등이 있다.

F-86 세이버, 호커 헌터(Hawker Hunter) 등이 날씬한 기체를 하고 있었던 반면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상대적으로 굵고 짧은 기체를 하고 있어서 통이란 별명이 어울리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1948년 9월 1일에 첫 비행을 마친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투기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비행성능은 아주 뛰어나서 1954년에는 500㎞ 구간에서 세계기록인 977.3㎞/h를, 1955년에는 1,000㎞ 구간에서 900.6㎞/h의 기록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과 같은 강대국들이 임무에 맡게 최적화된 전투기들을 따로 운용하는 것과는 달리 스웨덴에서는 사브 29의 기수에 20㎜ 기관포를 탑재한 공대공전투기인 J29와 기관포 대신에 정찰용 카메라를 탑재한 S29 및 공대지공격기인 A29의 세 가지 유형으로 운용하였다.

사브 J29

 

한편 1955년까지 중립정책을 취하고 있던 스웨덴은 중립정책을 포기한 이후에도 외국과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유엔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1년 9월 28일에 5대의 J29B로 구성된 특별전투비행대인 제22 비행대를 편성하여 콩고에 파견한 것이 최초이자 유일한 스웨덴 공군의 해외파병 기록으로 남아있다.

스웨덴을 출발한 제22 비행대는 10월 4일에 지금은 킨샤사로 이름이 바뀐 콩고의 수도인 레오폴드빌(Léopoldville)에 도착하여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어서 1962년 4월에는 4기의 J29B와 2기의 S29C가 추가로 파병되어 유엔군 전투기의 주력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작전참가로는 1962년 12월에 카탕가 분리독립세력의 지상기지에 대한 공격임무에 투입되어 6일 동안 150시간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작전에 참가한 9대의 J29B 중에서 8대가 대공포에 손상을 입으면서도 로켓공격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일기가 고르지 않아 항공정찰이 어렵다던 콩고에서의 항공정찰에 투입된 2대의 S29C도 지상목표물의 정찰에 뛰어난 활약을 함으로써 지상공격의 효과를 극대화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콩고에 파견된 유엔군의 전투기는 스웨덴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 외에도 에티오피아 공군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가 있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단기간의 운용으로 종료되었던 반면에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착륙사고로 1기가 파손된 것을 제하고는 1963년까지 전투에 의한 손실은 전혀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고 모두 11기가 파견되었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단지 4기만이 스웨덴으로 귀환하였고, 나머지는 기지에서 모두 파괴하는 것으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임무를 마쳤다.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의 해외수출이 오스트리아에 30대의 J29A와 S29C를 수출했던 것이 유일했던 이유는 동서냉전의 시대에 스웨덴의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각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지 결코 미국의 F-86F와 소련의 MiG-15보다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벤츠 차체에 BMW 보닛을 얹은 것 같은 XB-24J 폭격기

벤츠 차체에 BMW 보닛을 얹은 것 같은 XB-24J 폭격기

라이벌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협업을 하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일이 제2차 대전 당시 폭격기를 생산할 때에도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운용하던 대표적인 폭격기였던 B-17 플라잉 포트리스(B-17 Flying Fortress)와 B-24 리버레이트(B-24 Liberator)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B-17의 제작사는 보잉이었고 B-24는 콘실리데이티드 에어크래프트(Consolidated Aircraft)라는 곳에서 제작하였다.

후에 콘실리데이티드 에어크래프트(Consolidated Aircraft)는 발티 에어크래프트(Vultee Aircraft Corp.)와 합병으로 콘베어(Convair)가 되었다가 이후 제너럴 다이내믹스를 거쳐 지금은 록히드 마틴에 인수되었다.

모두 18,482대가 제작된 B-24는 2차 대전 중에 가장 많이 생산된 폭격기로 최대 4톤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 기체는 굵으면서도 기체의 단면은 가로보다 세로가 긴 형태를 하고 있었고 제일 위에 조종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B-24D

 

이런 점 때문에 조종사들의 전방시야가 좋지 못하다는 불만이 제기되었고 특히 가장 많이 생산된 B-24J를 비롯한 B-24H는 기수에 회전형의 총탑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더욱 조종사들의 시야를 어렵게 만들었다.

B-24J

 

이런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바로 B-24의 기체에 B-17의 기수를 탑재하자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XB-24J란 기종이었다.

전쟁 동안 짧은 시간에 조종사의 시야를 개선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재설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이런 편법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B-17의 기수 단면은 B-24처럼 세로가 훨씬 긴 형태도 아니면서 기수에 있는 총좌도 하부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B-17G

 

B-24J

 

이렇게 해서 B-24J에 B-17G의 기수를 탑재하여 XB-24J란 이름의 시험제작을 하게 되었지만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단 1대를 제작하는 것으로 계획은 종료되었다.

XB-24J

조종사의 시야를 확보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실제로 운영할 경우에는 큰 장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계획이 유야무야된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라 보는 것이 상식적일 것일 텐데 착륙장치라고 하는 랜딩 기어(landing gear)는 바퀴 한 개가 앞쪽에 있는 트라이시클(tricycle) 방식과 꼬리부분에 있는 트레일드래거(Taildragger) 방식이 있고, 트라이시클 방식의 B-24J에 트레일드래거로 설계된 B-17의 기수만 떼어내 부착한다는 것은 안전상의 문제도 제기되어 계획은 없었던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B-17G

 

B-24D

하늘에서 내려온 피아노

하늘에서 내려온 피아노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정부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그 외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악기를 제조하는 업체도 예외는 아니어서 피아노를 생산하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는 피아노를 생산하는 대신 군용글라이더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철이나 구리 및 황동과 같은 금속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는데 사용해야 했으므로 일반제품들의 생산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고 악기를 제조하던 업체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거나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으로서는 존폐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악기를 제조하던 업체들은 이익은 발생하지 않더라도 기업을 존속시키기 위해 스타인웨이는 군용 글라이더의 부품을 생산했고 기타 메이커로 유명한 깁슨(Gibson Guitar Company)은 나무장난감을 만들면서 근근이 사업을 이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군용피아노를 생산하는 계약을 미군과 맺게 되었고, 4명의 병사가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게는 200㎏ 이하, 폭은 1m가 안 되는 크기의 피아노를 만들어 1942년 6월부터 납품을 하게 되었는데 이의 제작에 소요된 금속은 일반 그랜드 피아노의 10%에 불과한 15㎏에 불과했다.

상자에 포장되어 수송을 기다리는 빅토리 버티컬

 

이렇게 만들어진 피아노는 빅토리 버티컬(Victory Verticals) 또는 GI 스타인웨이(GI Steinways)로 불렸는데 낙하산을 이용하여 주둔지로 전달하였다고 한다.

빅토리 버티컬과 함께 노래하고 있는 바리톤 벤자민 델로치(Benjamin DeLoache)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3대륙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군에게 2,500대의 빅토리 버티컬(Victory Verticals)을 납품했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는 전쟁 이후에도 미군에게 피아노를 납품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1961년 원자력잠수함 토마스 에디슨(USS Thomas A. Edison)이 진수할 때 함장의 요청에 의해 식당에 스타인웨이의 피아노가 설치되었고 1983년 퇴역할 때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은 워싱턴 DC의 해군역사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사기진작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빅토리 버티컬(Victory Verticals)은 어느 병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이틀 전 한 대의 지프가 왜건을 끌고 야영지에 오는 바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만일 엄마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분명 웃었을 텐데, 왜냐 하면 등화장치가 달린 왜건에 실려 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제이크 삼촌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예요.

아주 작고 카키색으로 칠해진 그 피아노는 피아노가 아니라 지프처럼 보이더라니까요.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출처: Amusing Planet-That Time When America Air-Dropped Pianos For Troops in Battlefields

편대비행의 유래와 각종 기록들

편대비행의 유래와 각종 기록들

두 대 이상의 항공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을 이루며 집단 비행하는 것을 말하는 편대비행(編隊飛行: Formation Flight)은 세계최초로 100기의 적기를 격추하는 기록을 세운 독일공군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가 고안한 것이다.

1913년 3월 18일 프로이센 왕국의 겔젠키르헨(Gelsenkirchen)에서 태어난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1931년 10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6월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으나 항공수송학교로 다시 진학하게 된다.

심한 멀미로 인해 비행임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아이러니 하게도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콘도르 군단(Legion Condor)에 자원하여 1938년부터 제88전투비행단의 제3중대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당시 독일공군의 주력기로 2차 대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메서슈미트 BF 109의 고속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 이전까지 3기가 편대를 이루던 케테(Kette)편대로는 각각의 전투기가 상호 지원하는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을 보완하여 2기의 전투기로 구성되는 로테(Rotte)와 2개의 로테(Rotte)로 이루어져 4기의 전투기가 편대를 형성하는 쉬바름(Schwarm)을 고안하게 된다.

메서슈미트 BF 109

 

베르너 묄더스가 고안한 쉬바름(Schwarm)편대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국공군은 이를 포 핑거(Finger-four 또는 four finger formation)라고 불렀고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12기 나아가서는 24기가 편대를 이루게도 되었다.

 

1941년 11월 22일 악천후로 인한 추락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모두 115기의 적기를 격추했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의 로테(Rotte)와 쉬바름(Schwarm)편대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조종사였던 존 타치(John Thach)에 의해 변형·발전하게 된다.

존 타치(John Thach)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에셜론(Echelon)대형이 주를 이루었으나 연합군이 제로라고 불렀던 일본의 0식 함상전투기가 뛰어난 기동성과 높은 고도에서의 전투력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자 1941년 9월 22일 이에 관한 정보를 처음 들은 존 타치(John Thach)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집단전술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그가 고안한 타치 위브(Thach Weave)가 탄생하게 되었다.

 

정식명칭인 빔 디펜스 포지션(Beam Defense Position)보다는 타치 위브(Thach Weave)로 불렸던 이 전술은 방어적 개념의 것으로 직물을 짜는(Weave) 움직임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타치 위브(Thach Weave)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던 존 타치(John Thach)는 일본군의 가미가제 자살공격으로부터 미국함대를 보호하기 위한 전술(Big blue blanket)도 고안하였는데 이것은 함대의 선봉에 초계기를 배치하고 상공에는 네이비 블루 색깔의 그러먼 F6F 헬캣 (Grumman F6F Hellcat)을 계속해서 배치하며 항공모함이나 수송선의 주변 50마일 내에 호위구축함을 배치하는 전술이었다.

이렇게 발전해온 편대비행에서 가장 많은 대수의 항공기가 편대를 이루어 비행한 기록은 2013년 10월 13일 미국의 미식축구팀 캔자스시티 치프스(Kansas City Chiefs)의 홈구장인 애로우헤드 경기장(Arrowhead Stadium) 상공을 민간항공기 49대가 편대를 이루어 비행한 것이 세계기록으로 남아있다.

 

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일군 장교

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일군 장교

2000년에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비무장지대를 수색 중이던 이병헌이 지뢰를 밟고 이것을 북한군 역을 맡은 송강호가 구해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오늘은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이고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적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No man hath greater love than he who layeth down his life for his enemy.)”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독일군 장교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는 1944년 9월 19일부터 시작되었던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에 참가하여 미군과 교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

 

이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는 미군이 독일의 본토에서 벌인 단일작전으로는 가장 기간이 긴 전투였으며 3만3천에 달하는 병력의 손실을 가져온 실패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 병력도 2만8천 정도가 손실을 당하는 쌍방이 큰 피해를 입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를 두고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휘르트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깨에 그들의 수호천사가 있어야만 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1944년 11월 12일 독일군 프레드리히 중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력을 지휘하여 이른 아침부터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때 독일군의 지뢰지대에서 살려달라는 미군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프레드리히 중위는 휘하의 장병들에게 부상을 입고 지뢰지대에 있는 미군을 구하러 오는 병력을 향해 사격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철수를 하고 아무도 없었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미군 병사의 외치는 소리도 점차 약해져갔습니다. 이에 프레드리히 중위는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조끼와 깃발을 들고 직접 미군병사를 구조하기 위해 지뢰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는데 그때가 10시 30분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군을 구하러 가던 도중 지뢰를 밟은 프레드리히 중위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고, 8시간 후에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으며 구조하려던 미군의 생사도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지뢰밭에서 홀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야 했겠지요.

이렇게 지뢰밭에서 부상을 당하고 구조를 바라던 이름 모를 미군병사와 그를 구하려던 독일군 장교 프레드리히 중위는 목숨을 잃게 되고 이 사실은 묻혀버릴 수도 있었으나 프레드리히 중위와 함께 구조작전에 투입되었던 통신병 “휴버트 기스(Hubert Gees)”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휴버트 기스(Hubert Gees)”는 프레드리히 중위가 “가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자!”라고 명령한 것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하면서 지뢰로 부상당한 프리데르히 중위는 그날 저녁 프로이츠하임에 있던 응급야전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런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숨진 미군이 소속되었던 미군 제22연대에서는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존 루글즈(John Ruggles)”대령의 주도로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 50주년이던 1994년 10월 7일에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는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 아닌 뒤렌-롤스도로프(Düren-Rölsdorf)의 38번 묘지에 잠들어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왜 F-15EX를 도입하는 것일까?

미국은 왜 F-15EX를 도입하는 것일까?

2019년 3월 21일 미국방부는 2020년도 예산안에 F-15EX 8대의 도입을 위해 10억5천만 달러를 책정했다고 발표하면서 2024년까지 5년에 걸쳐 모두 80대의 F-15EX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보잉사의 제안에 따라 F-15C를 개량한 ‘F-15C 2040’을 미공군이 도입한다는 것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F-15E를 기반으로 하는 다목적 전투기인 F-15EX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미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F-15 기종은 단좌형인 F-15C와 복좌형인 F-15D를 비롯하여 다목적기종인 F-15E의 3종류이며 이 가운데 F-15C와 F-15D는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는 모델이고 F-15E만이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에는 F-15SA로, 카타르에는 F-15QA라는 이름으로 수출하기 위해 계속해서 생산이 되고 있다.

따라서 추가로 생산라인을 설치하기 위한 투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의 상승을 피할 수 있어서 F-15E를 기반으로 하는 F-15EX가 채택된 것이라고 보잉사는 밝히고 있으며 보잉사는 MSIP(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형 F-15E를 ‘고급형(Advanced) F-15E’라고 부르고 있는데 복좌형이 아닌 단좌형의 F-15EX를 개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제5세대 전투기인 F-35가 보급되고 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미 공군이 F-15EX를 도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지난 3월 14일 미국 상원군사위원회에 참석한 조셉 던포드 합참의장이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셉 던포드 합참의장에 따르면 미 공군이 F-15EX를 도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투기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보잉사의 계산으로는 매년 72대의 전투기를 신규로 도입해야 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 국방부의 2020년도 예산안에 의하면 모두 8대의 F-15EX를 도입하기 위해 10억 5천만 달러가 소요된다고 하니 1대당 가격은 1억3,125만 달러로 F-35보다 비싸고, 18대를 도입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2021년 이후라야 F-35의 가격에 근접한 수준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F-15EX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F-35나 F-22와 같은 5세대 전투기들을 투입할 필요가 없는 작전환경에서는 무장탑재량이나 항속거리 및 속도가 F-35보다 뛰어난 F-15EX를 투입하여 운용한다는 전술개념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던포드 합참의장이 밝힌 것처럼 전투기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유지비용이 F-35의 절반 정도이고 기체수명도 2배 이상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 시간당 유지비가 가장 높은 군용기 Top10

 

아직까지 F-15EX의 제원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보잉사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글래스 칵핏(glass cockpit)을 적용한 것 이외에 무장탑재량의 증가와 전자전장비를 비롯한 엔진의 개량 등이 F-15EX의 특징으로 보이고 있으며 F-15 시리즈로는 최초로 F-15SA와 F-15QA에 적용한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 fly-by-wire)를 F-15EX에도 적용할 것으로 판단이 된다.

출처: 보잉사 홈페이지

 

얘기가 조금 주제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한일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군사력의 비교인데 특히 전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우수한 기종을 가지고 있다.”라거나 “보유대수가 적어서 일본이 더 우세하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 전투기는 F-15와 F-16인데 F-16의 경우에는 일본이 91대, 우리나라가 118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미국과 동일한 F-16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이 가진 것은 대공전투력은 낮추고 함선을 공격하기 위한 능력을 높였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대공전투력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나라가 보유한 F-16이 일본보다 우수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F-15 기종도 자국의 작전개념에 맞는 것을 채택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는 공대공전투력과 지상을 공격하는 능력을 두루 갖춘 전폭기라고 불리는 F-15E의 파생형인 F-15K를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은 공대공전투력에 초점을 맞추어 F-15C/D의 파생형인 F-15J/DJ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F-15K

 

참고로 보유대수는 일본이 201기, 우리나라가 59기로 일본이 월등히 앞서고 있는데 일본은 보유하고 있는 F-15J/DJ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을 2018년 방위력정비계획에 포함시켰다.

F-15J

 

현재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총 201기의 F-15J/DJ 중에서 1985년 이후에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이 적용되어 도입한 102기는 이름을 ‘J-MSIP’로 부르며 현대전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하였고, 1985년 이전에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이 적용되지 않고 도입된 99기는 ‘Pre-MSIP’로 부르며 63기의 F-35A와 42기의 F-35B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도 F-35의 도입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써 보유하고 있는 ‘Pre-MSIP’를 미국에 재판매하고 그 대금을 F-35의 구입자금에 충당한다는 제안을 미국 측에 전달하였는데 아마도 양국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져 실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고 있다.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저격수들이 활약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코 소련을 들 수 있는데 이번에는 가장 많은 소련군을 저격하여 2차 대전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이름을 남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연합국의 일원이 아닌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사(戰史)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도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진다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아돌프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합병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는데 형식적이나마 오스트리아의 국민투표를 거치기는 하였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제국의 하나의 주인 오스트마르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 티롤주에 있는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라는 산악 마을에서 1924년 12월 23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가 태어났다.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

농부이면서 사냥에 능했던 아버지 시몬 헤체나우어(Simon Hetzenauer)와 어머니 막달레나 헤체나우어(Magdalena Hetzenauer)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녀의 셋째였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아버지로부터 사냥하는 법을 배웠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Austro-Hungarian Army)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훈장을 받았던 삼촌으로부터는 군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알프스의 산과 계곡에서 사냥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장술을 익혔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17세였던 1942년 9월에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알프스산양 샤무아(chamois)를 잡던 민첩함과 뛰어난 사격술은 그를 단순한 산악경보병인 게비르크스예거(Gebirgsjäger)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저격훈련을 마친 다음 저격병으로 복무하게 만든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제3 산악경보병사단, 제144 산악경보병연대에 배속되어 공식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하게 되는데 주로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저격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2가지의 소총을 사용했는데 가장 즐겨 사용했던 것은 줄여서 Kar98k라고 하는 Mauser Karabiner 98k의 저격용 소총으로 6배율의 자이스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4배율의 스코프가 장착된 게베어43(Gewehr 43)은 주로 근거리에 위치한 목표물들을 저격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Kar98k

 

Gewehr43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의 주요목표물은 산악여단의 포병을 노리는 소련군의 기관총 사수와 저격수들이었으며 특히 기관총 사수와 소련군 지휘관을 저격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1944년 7월 저격훈련을 마치고 8월부터 저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1944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9개월 동안에 345명의 소련군을 사살하여 1945년 4월 17일에는 일반 독일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기사십자 철십자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을 수여 받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5년 5월에는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전쟁포로의 신분이 되어 수용소에 수감되는데 2차 대전 동안에만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들이 소련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거의 1/3에 가까운 수가 수용소에서 사망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5년의 시간을 끈질기게 이겨내고 1950년에 석방되어 그리운 고향,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로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 마리아란 여성과 결혼하고 목수로 생활했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전쟁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다가 2004년 10월 3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정식명칭이 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인 미국 해안경비대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6·25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이지만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또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미국의 법률로 지정하고 있는 군대의 단위에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함께 해안경비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해안경비대가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대통령의 명령이나 의회의 결정으로 해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1790년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제청으로 1790년 8월 4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창설되었던 해안경비대는 일부 자료에 의하면 관세밀수감시청(US Revenue Cutter service)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정보는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설될 당시,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던 해안경비대는 별도의 이름이 없이 커터(The cutters) 또는 커터 시스템(The system of cutters)으로 불리다가 1860년대까지는 징세해상부대(revenue marine)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에는 세관감시부(Revenue Cutter Service)로 불렸고 1915년 1월 28일에 미국인명구조부(Life Saving Service)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1798년 프랑스와 벌어졌던 ‘유사전쟁(Quasi War)’의 참전을 필두로 이라크전쟁에도 참전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이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 3만5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가 해군의 소속이 아닌 독자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참가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광복 직후 해군의 창설을 목적으로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성된 해사관계 군사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의 단장이었던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요청으로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 대위가 이끄는 병력이 1946년 8월 23일 내한하여 자문과 지도를 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나라의 해군으로 정식발족을 앞두고 있던 그 해 5월에는 미국해안경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이 한국에 도착하여 미국해안경비대의 지휘관 겸 고문관의 역할을 맡게 된다.

손원일 제독과 윌리엄 아처치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그러나 대한민국이 정식 해군의 발족을 앞두게 되자 다른 나라의 해군을 훈련시키는 것은 해안경비대의 임무가 아니란 결정에 의해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병력은 모두 귀국하게 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들이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8월 19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이자 미국해안경비대의 전 사령관이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최고고문관의 임무를 맡게 되고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은 대표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대한민국 해군이 사용할 선박문제로 대만을 방문하고 있을 때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들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공수해야 하는 물자의 선적을 마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과 재회하게 되고 1950년 7월,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주로 펄스전파를 이용하는 항법장치인 로란(LORAN)기지국의 설치·운영과 무선중계기의 설치 및 병력의 해상구조가 주요임무였다.

부산에 있었던 로란(LORAN)기지국

 

미국해안경비대가 한국전쟁 동안 수행했던 수많은 해상 인명구조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1953년 1월 18일 있었던 미 해군의 해상초계기 P-2V넵튠의 격추사건을 들 수 있다.

중공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을 비행 중이던 P2V 초계기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바다에 추락하고 승무원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 미국해안경비대는 필리핀의 해군기지(US Naval Station Sangley Point)에 주둔하고 있던 베테랑 조종사,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가 조종하는 구조기와 미치 페리(Mitch Perry) 중위가 조종하는 지원기로 2대의 수상비행기(PBM-5G)를 급파하여 생존자의 구출에 나서게 된다.

P-2V넵튠

 

현장에 도착한 수상비행기(PBM-5G)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물에 의지하고 있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착륙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고 기상이 좋지 않아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험이 높아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착륙을 감행하게 된다.

무사히 바다에 착륙한 비행기는 해군초계기에 탑승하고 있었던 총 13명의 승무원 중에서 생존자 11명을 태우고 이륙을 시도하게 되는데, 떨어져 있던 2명의 생존자는 해변으로 밀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PBM-5G

 

11명의 초계기 생존자와 본인을 포함하여 8명의 PBM-5G 탑승자 등 모두 19명을 태우고 이륙하려던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5m가 넘는 파도와 초속 24m에 달하는 강풍으로 쉽게 이륙하지 못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륙 보조 로케트(JATO bottle)’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륙과 동시에 엔진 이상으로 PBM-5G는 다시 바다로 추락하게 되고 밤이 되어서야 해군의 구축함 USS Halsey Powell(DD 686)에 의해서 구조가 되지만 초계기 P-2V넵튠에 타고 있던 4명의 해군과 PBM-5G에 탑승하고 있던 5명의 해안경비대원은 목숨을 잃고 만다.

USS Halsey Powell(DD 686)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및 유엔군 참전 유공자들을 청와대의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아직 완전한 종전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북미 간의 비핵화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고,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