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대비행의 유래와 각종 기록들

편대비행의 유래와 각종 기록들

두 대 이상의 항공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을 이루며 집단 비행하는 것을 말하는 편대비행(編隊飛行: Formation Flight)은 세계최초로 100기의 적기를 격추하는 기록을 세운 독일공군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가 고안한 것이다.

1913년 3월 18일 프로이센 왕국의 겔젠키르헨(Gelsenkirchen)에서 태어난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1931년 10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6월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으나 항공수송학교로 다시 진학하게 된다.

심한 멀미로 인해 비행임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아이러니 하게도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콘도르 군단(Legion Condor)에 자원하여 1938년부터 제88전투비행단의 제3중대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는 당시 독일공군의 주력기로 2차 대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메서슈미트 BF 109의 고속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 이전까지 3기가 편대를 이루던 케테(Kette)편대로는 각각의 전투기가 상호 지원하는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을 보완하여 2기의 전투기로 구성되는 로테(Rotte)와 2개의 로테(Rotte)로 이루어져 4기의 전투기가 편대를 형성하는 쉬바름(Schwarm)을 고안하게 된다.

메서슈미트 BF 109

 

베르너 묄더스가 고안한 쉬바름(Schwarm)편대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국공군은 이를 포 핑거(Finger-four 또는 four finger formation)라고 불렀고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12기 나아가서는 24기가 편대를 이루게도 되었다.

 

1941년 11월 22일 악천후로 인한 추락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모두 115기의 적기를 격추했던 베르너 묄더스(Werner Mölders)의 로테(Rotte)와 쉬바름(Schwarm)편대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조종사였던 존 타치(John Thach)에 의해 변형·발전하게 된다.

존 타치(John Thach)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에셜론(Echelon)대형이 주를 이루었으나 연합군이 제로라고 불렀던 일본의 0식 함상전투기가 뛰어난 기동성과 높은 고도에서의 전투력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자 1941년 9월 22일 이에 관한 정보를 처음 들은 존 타치(John Thach)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집단전술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그가 고안한 타치 위브(Thach Weave)가 탄생하게 되었다.

 

정식명칭인 빔 디펜스 포지션(Beam Defense Position)보다는 타치 위브(Thach Weave)로 불렸던 이 전술은 방어적 개념의 것으로 직물을 짜는(Weave) 움직임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타치 위브(Thach Weave)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던 존 타치(John Thach)는 일본군의 가미가제 자살공격으로부터 미국함대를 보호하기 위한 전술(Big blue blanket)도 고안하였는데 이것은 함대의 선봉에 초계기를 배치하고 상공에는 네이비 블루 색깔의 그러먼 F6F 헬캣 (Grumman F6F Hellcat)을 계속해서 배치하며 항공모함이나 수송선의 주변 50마일 내에 호위구축함을 배치하는 전술이었다.

이렇게 발전해온 편대비행에서 가장 많은 대수의 항공기가 편대를 이루어 비행한 기록은 2013년 10월 13일 미국의 미식축구팀 캔자스시티 치프스(Kansas City Chiefs)의 홈구장인 애로우헤드 경기장(Arrowhead Stadium) 상공을 민간항공기 49대가 편대를 이루어 비행한 것이 세계기록으로 남아있다.

 

연봉 2억 원이 넘는 샌프란시스코의 분뇨수거 종사원

연봉 2억 원이 넘는 샌프란시스코의 분뇨수거 종사원

치솟는 집값과 주택임대료 때문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부족한 공중화장실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는 사람들의 분뇨가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똥오줌왕국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일까요?

중산층은 사라지고 부유층과 빈곤층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지나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의 분뇨를 처리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1년 수입이 한화로 2억원이 넘는다는 뉴스가 지난 8월 22일 샌프란시스코의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The San Francisco Chronicle)”을 통해서 보도되었습니다.

관련기사: Street housekeeping keeps SF Mayor Breed

샌프란시스코에서는 2018년 올 한 해에만 벌써 거리의 분뇨와 관련한 민원을 담당하는 전화 “311”에 접수된 건수가 8월 13일까지 14,597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들의 숫자는 7,4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 만성적인 노숙자의 숫자는 여전히 높은 상태이며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소득이 일반적인 미국인의 연소득보다 2배가 훨씬 넘는 96,677달러라고 하지만 투룸을 기준으로 한 임대료는 다른 도시의 평균인 1,180달러보다 3배가량이나 높은 3,090달러를 기록하고 있어서 노숙자의 숫자가 실감할 정도로 감소하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그들이 배설하는 분뇨가 사회적인 골칫거리로 대두하자 올해 6월에 취임한 런던 브리드 (London Breed) 시장은 시를 청소하는데 예산 830,977달러를 배정하여 거리의 배설물을 제거하는 정화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 있는 배설물을 제거하는 직원들은 “Poop(똥) Patrol”이라고 불리며 도시정화 작업에 투입되고 있는데 그들이 받는 수입은 연간 급여 7,1760달러를 포함하여 의료보험과 퇴직금 등 각종 수당을 별도로 11,2918달러나 받게 되어 총액이 한화로 2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그 돈으로 차라리 공중화장실을 더 설치하는 것이 낫다고 반대하고 있는데 시에서는 예산 100만 달러를 책정하여 이동식 화장실을 추가로 설치하고 애완동물들의 배설물을 처리할 수 있는 “피트 스톱(Pit Stop)”도 증설한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현재 거리의 노숙자들이 애완동물의 배설물을 처리하도록 만든 “피트 스톱(Pit Stop)”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22개의 “피트 스톱(Pit Stop)” 중에서 매일 운영되는 곳은 10개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밤 8시가 넘으면 운영을 중단하고 있어서 늦은 시각에 노숙자들이 볼일을 볼 수 있는 공간이 태부족한 실정입니다.

 

런던 브리드 (London Breed) 시장은 취임하면서 3개월 내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고 하는데 벌써 9월인데 목표한 바를 이루기는 불가능해 보이며 아마도 몇 년이 걸려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소득의 분배와 주택문제의 해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분뇨제거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로서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뉴욕의 한복판에 문을 연 글램핑장

뉴욕의 한복판에 문을 연 글램핑장

뉴욕의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에 1박에 150~700달러 하는 고급 글램핑장이 2018년 7월 문을 열었습니다.

다양한 요리와 바비큐를 먹으면서 맨하탄의 야경을 즐길 수도 있는 이곳은 콜로라다 주와 뉴욕의 허드슨 밸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글램핑장을 운영하고 있는 “Collective Retreats”란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올해는 섬이 폐장되기 전인 10월 31일까지 문을 연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의 글램핑장을 둘러보겠습니다.

 

▶ 글램핑장이 위치한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는 한때는 미육군의 주둔지였으며 뉴욕항구에 있는 약 70만 평의 면적을 가진 작은 섬입니다.

 

▶ 섬은 로어맨하탄(Lower Manhattan)에서 페리로 8분 거리에 있습니다.

 

▶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는 야간에는 자동차가 출입할 수 없는 섬입니다.

 

▶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가 무엇보다도 자랑하는 것은 맨하탄의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자유의 여신상도 바라보이구요~

 

▶ 이용할 수 있는 텐트는 저니텐트(Journey Tent)와 서밋텐트(Summit Tent)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저니텐트를 이용하는 고객은 공동으로 욕실을 사용해야 하며 온수는 24시간 제공되고, 커피나 홍차와 같은 간단한 음료는 무료이며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데 1일 사용료는 150달러라고 합니다.

 

▶ 서밋텐트는 저니텐트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 서밋텐트를 이용하면 아침식사는 무료로 제공되며 캠프파이어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도 제공되고 전용 데크에서 모닝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도 합니다.

 

▶ 서밋텐트의 숙박비에는 “Three Peaks Lodge”에서 제공하는 조식비가 포함되어 있는데 저니텐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19달러를 지불해야 이용할 수 있으며 12살 이하 어린이들의 요금은 12달러라고 합니다.

 

▶ “Three Peaks Lodge”에서는 저녁식사도 제공하는데 특히 항구를 바라볼 수 있는 야외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기려면 120달러를 지불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28~38달러 정도면 식사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맥주나 와인과 같은 주류도 “Three Peaks Lodge”에서 판매하고 있고 샌드위치와 같은 간단한 테이크아웃 메뉴도 있다고 합니다.

 

▶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의 글램핑장에서는 자전거나 미니 골프와 같은 레저활동도 즐길 수 있고 해먹에 누워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도 별도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목요일은 오후 6시, 금요일은 밤 10시, 토요일은 밤 11시, 일요일은 저녁 7시 이후에는 섬을 출입할 수 없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된 곳은 어디일까?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된 곳은 어디일까?

오늘자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남북 간에 전쟁위험 요소를 근본적으로 해소해 나가기 위해 지상, 해상, 공중에서의 상호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문제와 함께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와 안전한 어로활동 보장을 위한 서해 평화수역 설치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또한 비무장지대(DMZ)를 명실상부한 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원칙에 합의하고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해를 공동으로 발굴하는 작업도 협의 중이라고 하는데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모두 200만 발 가량의 지뢰가 휴전선 철책 주변에 매설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기사원문: 한국이 자체 개발한 특수전차, 통일 되면 DMZ 지뢰 제거 나선다

 

그러면 길이 250km에 이르는 휴전선의 비무장지대에 매설되어 있는 200만 발의 지뢰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된 곳일까요?

정답은 No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곳은 서사하라를 남북으로 가르는 길이 2,700km의 모로코 장벽(Moroccan Wall)이 있는 곳으로 현재 추정하기로는 약 7백만 발의 지뢰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길이 2,700km 높이 3미터의 모래로 만들어진 이 장벽의 중간 중간에는 철조망과 전기울타리 등이 설치되어 있고 군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장벽이 만들어진 원인은 폴리사리오해방전선이 수립하였으나 국제적으로는 아직 독립국가로서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는 서사하라, 정식명칭은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과 모로코 간의 영토분쟁으로 인한 것입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폴리사리오해방전선의 침투를 막기 위해 모로코 정부가 만들기 시작한 이 장벽은 대부분이 모래로 되어 있으나 무수한 대인지뢰가 매설되어 있어서 세계의 인권단체들은 이것을 “치욕의 장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불모지에 가까운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의 지역에서 모로코로 넘어가려던 2,5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지뢰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으며 그 중에는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는 있으나 극히 미약한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모하메드 물루드 예슬렘(Mohamed Mouloud Yeslem)이란 사람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고픈 서사하라의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폭력과 분쟁이 아닌 평화와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모로코 장벽의 앞에 꽃을 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일군 장교

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일군 장교

2000년에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비무장지대를 수색 중이던 이병헌이 지뢰를 밟고 이것을 북한군 역을 맡은 송강호가 구해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오늘은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이고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적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No man hath greater love than he who layeth down his life for his enemy.)”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독일군 장교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는 1944년 9월 19일부터 시작되었던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에 참가하여 미군과 교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

 

이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는 미군이 독일의 본토에서 벌인 단일작전으로는 가장 기간이 긴 전투였으며 3만3천에 달하는 병력의 손실을 가져온 실패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 병력도 2만8천 정도가 손실을 당하는 쌍방이 큰 피해를 입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를 두고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휘르트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깨에 그들의 수호천사가 있어야만 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1944년 11월 12일 독일군 프레드리히 중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력을 지휘하여 이른 아침부터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때 독일군의 지뢰지대에서 살려달라는 미군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프레드리히 중위는 휘하의 장병들에게 부상을 입고 지뢰지대에 있는 미군을 구하러 오는 병력을 향해 사격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철수를 하고 아무도 없었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미군 병사의 외치는 소리도 점차 약해져갔습니다. 이에 프레드리히 중위는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조끼와 깃발을 들고 직접 미군병사를 구조하기 위해 지뢰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는데 그때가 10시 30분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군을 구하러 가던 도중 지뢰를 밟은 프레드리히 중위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고, 8시간 후에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으며 구조하려던 미군의 생사도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지뢰밭에서 홀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야 했겠지요.

이렇게 지뢰밭에서 부상을 당하고 구조를 바라던 이름 모를 미군병사와 그를 구하려던 독일군 장교 프레드리히 중위는 목숨을 잃게 되고 이 사실은 묻혀버릴 수도 있었으나 프레드리히 중위와 함께 구조작전에 투입되었던 통신병 “휴버트 기스(Hubert Gees)”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휴버트 기스(Hubert Gees)”는 프레드리히 중위가 “가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자!”라고 명령한 것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하면서 지뢰로 부상당한 프리데르히 중위는 그날 저녁 프로이츠하임에 있던 응급야전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런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숨진 미군이 소속되었던 미군 제22연대에서는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존 루글즈(John Ruggles)”대령의 주도로 “휘르트겐 숲 전투(The Battle of Hürtgen Forest)” 50주년이던 1994년 10월 7일에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를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레드리히 렝펠드(Friedrich Lengfeld)” 중위는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 아닌 뒤렌-롤스도로프(Düren-Rölsdorf)의 38번 묘지에 잠들어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다.(살인의 심리학)

인간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다.(살인의 심리학)

전쟁은 적을 이겨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전쟁영화나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실상과는 달리 살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쉽게 저지름을 볼 수 있는데 폭력적인 영화와 게임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다.

얼마 전 “21 브릿지: 테러 셧다운”이란 영화를 봤는데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채드윅 보스만이 전쟁과 인간의 폭력성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하나는 칼 러셀(Carl Russell)의 1957년 저서, “초기 개척시대의 총기(Guns on the Early Frontiers)”에서 인용한 것으로 채드믹 보스만이 맡았던 주인공 안드레 데이비스(Andre Davis)는 범인 체포과정에서의 지나친 총기사용에 대하여 감찰을 받는 도중에 이런 말을 한다.

 

“남북전쟁 동안 어떤 병사들은 한 번도 사격을 하지 않고 머스킷총에 장전만 했어. 기껏해야 5, 6발 장전해봤겠지.(During the Civil War, some soldiers just kept loading their muskets without ever firing. Five or six balls loaded on top of each other.)”

이어서 그는 “베트남전의 최전선에서는 30%만이 총을 쐈다고 하지. 병사 10명 중 3명만 전투를 했다는 거야.(In Vietnam, only 30% of front line infantry soldiers ever fired a shot. So, ten soldiers in battle, only three truly fighting.)”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SLA Marshall’로 알려진 사무엘 리먼 앳우드 마샬(Samuel Lyman Atwood Marshal)이란 미 육군 준장 출신의 군사전문가가 쓴 책 ‘Men Against Fire’에 나오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사무엘 리먼 앳우드 마샬(Samuel Lyman Atwood Marshal)

Men Against Fire는 책보다는 넷플릭스의 드라마로 인해 ‘인간과 학살’이란 한글 제목이 더 친숙한데 사무엘 리먼 앳우드 마샬(Samuel Lyman Atwood Marshal)이 쓴 이 책은 진위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한국전쟁에 대한 조사를 들 수 있는데 1950년 미8군의 작전분석관으로 참전했던 마샬은 많은 병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그 때 만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데이비드 핵워스(David Hackworth)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군사전문가로 활발한 기고활동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핵워스(David Hackworth)는 한국전쟁 동안 사무엘 마샬(Samuel Marshal)을 만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을 비롯하여 마샬은 그의 조사와 통계 및 진실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전쟁 중에 행해지는 인간의 살상행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전쟁에서 인명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서 대비되는 이론을 전개한 군사전문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먼저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유명한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의 이론을 꼽을 수 있다.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그의 저서 “전쟁의 문화(The Culture of War)”에서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이란 책을 소개하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이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그 하나의 방편으로 전쟁을 들고 있다.

 

그리고 제6장 ‘전투의 재미(The Joy of Combat)’에서는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조차도 전쟁을 즐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전쟁을 기다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나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회상한다.”고 하는 다소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하여 남자는 고대로부터 사냥을 하면서 흥미를 느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살상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쟁이란 극한상황에 내몰려도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전문가들도 많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 데이브 그로스먼(Dave Grossman)을 꼽을 수 있다.

미 육군에서 23년을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데이브 그로스먼(Dave Grossman)은 그의 저서 ‘살인의 심리학(On killing: the psychological cost of learning to kill in war and society)’에서 인간의 내면에는 적(인간)을 죽이는 강한 거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인간을 죽여야 하는 전쟁에 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어떻게 인명을 빼앗는 행위에 익숙해질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착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에게 살인에 대한 저항감이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본능적이고 지적이며 환경적·유전적·문화적·사회적 요인의 결합으로 존재하는 것도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틀림없이 존재하는 ‘살인에 대한 저항감’이 인류에게 희망이 있음을 믿게 해준다.”

미국은 왜 F-15EX를 도입하는 것일까?

미국은 왜 F-15EX를 도입하는 것일까?

2019년 3월 21일 미국방부는 2020년도 예산안에 F-15EX 8대의 도입을 위해 10억5천만 달러를 책정했다고 발표하면서 2024년까지 5년에 걸쳐 모두 80대의 F-15EX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보잉사의 제안에 따라 F-15C를 개량한 ‘F-15C 2040’을 미공군이 도입한다는 것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F-15E를 기반으로 하는 다목적 전투기인 F-15EX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미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F-15 기종은 단좌형인 F-15C와 복좌형인 F-15D를 비롯하여 다목적기종인 F-15E의 3종류이며 이 가운데 F-15C와 F-15D는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는 모델이고 F-15E만이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에는 F-15SA로, 카타르에는 F-15QA라는 이름으로 수출하기 위해 계속해서 생산이 되고 있다.

따라서 추가로 생산라인을 설치하기 위한 투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의 상승을 피할 수 있어서 F-15E를 기반으로 하는 F-15EX가 채택된 것이라고 보잉사는 밝히고 있으며 보잉사는 MSIP(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형 F-15E를 ‘고급형(Advanced) F-15E’라고 부르고 있는데 복좌형이 아닌 단좌형의 F-15EX를 개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제5세대 전투기인 F-35가 보급되고 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미 공군이 F-15EX를 도입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지난 3월 14일 미국 상원군사위원회에 참석한 조셉 던포드 합참의장이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셉 던포드 합참의장에 따르면 미 공군이 F-15EX를 도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투기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보잉사의 계산으로는 매년 72대의 전투기를 신규로 도입해야 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 국방부의 2020년도 예산안에 의하면 모두 8대의 F-15EX를 도입하기 위해 10억 5천만 달러가 소요된다고 하니 1대당 가격은 1억3,125만 달러로 F-35보다 비싸고, 18대를 도입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2021년 이후라야 F-35의 가격에 근접한 수준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F-15EX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F-35나 F-22와 같은 5세대 전투기들을 투입할 필요가 없는 작전환경에서는 무장탑재량이나 항속거리 및 속도가 F-35보다 뛰어난 F-15EX를 투입하여 운용한다는 전술개념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던포드 합참의장이 밝힌 것처럼 전투기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유지비용이 F-35의 절반 정도이고 기체수명도 2배 이상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 시간당 유지비가 가장 높은 군용기 Top10

 

아직까지 F-15EX의 제원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보잉사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글래스 칵핏(glass cockpit)을 적용한 것 이외에 무장탑재량의 증가와 전자전장비를 비롯한 엔진의 개량 등이 F-15EX의 특징으로 보이고 있으며 F-15 시리즈로는 최초로 F-15SA와 F-15QA에 적용한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 fly-by-wire)를 F-15EX에도 적용할 것으로 판단이 된다.

출처: 보잉사 홈페이지

 

얘기가 조금 주제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한일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군사력의 비교인데 특히 전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우수한 기종을 가지고 있다.”라거나 “보유대수가 적어서 일본이 더 우세하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 전투기는 F-15와 F-16인데 F-16의 경우에는 일본이 91대, 우리나라가 118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미국과 동일한 F-16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이 가진 것은 대공전투력은 낮추고 함선을 공격하기 위한 능력을 높였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대공전투력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나라가 보유한 F-16이 일본보다 우수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F-15 기종도 자국의 작전개념에 맞는 것을 채택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는 공대공전투력과 지상을 공격하는 능력을 두루 갖춘 전폭기라고 불리는 F-15E의 파생형인 F-15K를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은 공대공전투력에 초점을 맞추어 F-15C/D의 파생형인 F-15J/DJ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F-15K

 

참고로 보유대수는 일본이 201기, 우리나라가 59기로 일본이 월등히 앞서고 있는데 일본은 보유하고 있는 F-15J/DJ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을 2018년 방위력정비계획에 포함시켰다.

F-15J

 

현재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총 201기의 F-15J/DJ 중에서 1985년 이후에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이 적용되어 도입한 102기는 이름을 ‘J-MSIP’로 부르며 현대전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하였고, 1985년 이전에 성능향상프로그램(Multi-Stage Improvement Program)이 적용되지 않고 도입된 99기는 ‘Pre-MSIP’로 부르며 63기의 F-35A와 42기의 F-35B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도 F-35의 도입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써 보유하고 있는 ‘Pre-MSIP’를 미국에 재판매하고 그 대금을 F-35의 구입자금에 충당한다는 제안을 미국 측에 전달하였는데 아마도 양국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져 실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고 있다.

땅속에서 발견한 페라리 디노 246GTS

땅속에서 발견한 페라리 디노 246GTS

현재의 금액으로 11만 달러 정도가 한다는 페라리 디노 246GTS가 땅속에 파묻힌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2월,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 아테네에 살고 있던 아이들이 흙을 파면서 놀고 있다가 땅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바로 보안관에게 신고를 했고 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굴착기를 동원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판 후 그들이 발견한 것은 1974년에 제작된 “페라리 디노 246GTS”였는데 당시의 금액으로 22,500달러인 이 차의 현재가치는 11만 달러 정도에 달한다고 하며 발견되기 4년 전에 도난신고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차는 1974년 10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로센도 크루즈(Rosendo Cruz)라는 사람이 구입하였고 2달 만에 도난신고가 되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흙속에 파묻힌 채로 발견된 “페라리 디노 246GTS”는 오토위크(AutoWeek)의 직원이었고 현재는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그렉 샤프(Greg Sharp)”의 조사에 의해서 1986년에 세부정보가 공개되었는데 이 차는 로센도 크루즈(Rosendo Cruz)가 부자들과 유명인들을 단골로 두고 있던 “Hollywood Sports Cars”에서 아내의 생일선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아내가 차를 도난당한 1974년 12월 7일은 그들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결혼기념일 당일 “브라운 더비(Brown Derby)”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즐기기 위해 차를 몰고 갔으나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고 노상에 주차를 했고, 저녁을 마치고 나오자 자동차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조금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 후 경찰수사는 도난사건으로 종결되었고 부부는 보험회사로부터 전액을 보상 받았는데 4년 후 땅속에서 이 차가 발견되면서 세계에 1,274대 밖에 없는 희소성으로 인해 차량의 소유권이 있는 보험회사에 구매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이에 보험사는 차량을 경매에 붙였지만 “패서디나(Pasadena)”의 창고에 보관하던 도중에 부품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입찰과 재입찰을 반복하여 현재 가치로 18,000~32,000 달러 사이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2년 이런 내용을 웹사이트 Jalopnik에 소개한 마이크 스페넬리(Mike Spinelli)에게 “브래드 하워드(Brad Howard)”란 사람이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낙찰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하워드란 사람이 이 차를 구입한 이유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로스앤젤레스는 극심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금만 손을 보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페라리 공식 딜러를 통해 수리할 때의 1/3의 비용으로 엔진을 수리하고 녹색으로 도색을 한 다음 “DUG UP”이라는 번호판까지 달았다는군요~

 

한편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보안관 캐롤(Carroll)은 범인을 체포할 수는 없었지만 제보자의 증언에 의하면 페라리 디노 246GTS의 도난은 크루즈 부부가 공모한 보험사기였으며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다가 차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제보에 의해 차량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보자의 신분보호를 위해 어린이들이 발견하여 신고한 것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며 차량을 훔친 절도범들은 끈질긴 수사에도 불구하고 체포하지 못했고 따라서 크루즈 부부의 보험사기도 입증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포르쉐가 만든 전차(戰車)는 독일판 군납비리?

포르쉐가 만든 전차(戰車)는 독일판 군납비리?

폭스바겐 비틀의 제작자이자 포르쉐(Porsche) 자동차의 창업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戰車)를 개발한 혐의로 전범으로 몰려 종전 후에 감옥에 가야 했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가 개발했던 전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포르쉐가 1942년 7월에 공개한 ‘포르쉐 티거(VK 4501P)’는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하이브리드 타입의 전차로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즉 가솔린 엔진으로 만든 전력으로 모터를 구동하여 달리는 방식이었지만 현재의 하이브리드 차량이 연비가 높다는 장점을 가진 것에 비해 포르쉐가 만든 전차는 연비의 개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검은 중절모를 쓴 사람이 페르디난트 포르쉐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전차의 동력원은 피스톤으로 움직이는 엔진인데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은 괜찮지만 회전수를 변경하거나 중지한 후 다시 재시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한 자동차처럼 전차도 정지상태에서 고속주행까지 다양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데 이때 엔진의 회전수를 변경하지 않으면서 궤도의 회전수를 바꾸기 위해 변속기와 클러치는 필수요소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보다 더욱 무거운 전차는 엔진도 훨씬 크고 변속기 또한 크고 단단하여 변속기를 조작할 때 레버를 망치로 치는 모습을 전쟁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으며 아예 변속기조작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병력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차의 고장원인이 대부분 변속기와 관련한 문제였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개발했던 것이 포르쉐의 하이브리드 전차인 티거였던 것입니다.

70여 년 전에 이런 하이브리드 방식의 변속기 자체가 없는 전차를 디자인한 포르쉐는 우선 좌우에는 2개의 지멘스-슈케르트(Siemens-Schuckert) D1495a 교류모터를 장착하고,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로 지멘스-슈케르트(Siemens-Schuckert)aGV 발전기 1대와 포르쉐 101/1V 10기통 엔진을 2개 장착하였는데 이것은 전차의 절반이 엔진룸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외형은 헨셀사의 “티거I(VK4501H)와 비슷하지만 전륜의 배치가 다르고 길이도 더 긴 포르쉐의 티거(VK4501P)는 우선 엔진(포르쉐 101/1V)의 발전능력이 부족하고 D1495a 교류모터는 원래 어뢰용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토크가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으며 지금의 하이브리드 차량과는 달리 에너지효율의 저하로 연비가 나쁘고 서스펜션의 취약으로 험로에서 주행할 경우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독일육군에서는 포르쉐가 개발한 전차를 심사에서 불합격시켰는데도 불구하고 “포르쉐 티거(VK4501P)”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군납비리에서 보던 것처럼 납품이 됩니다.

 

이처럼 불합격된 전차가 독일군에게 납품될 수 있었던 이유는 포르쉐와 친분이 두터웠던 히틀러의 덕분이었는데 전차가 개발되기 이전에 이미 90대의 생산허가를 받은 상태였고 100대를 납품하도록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포르쉐는 검사에서 문제가 제기된 엔진을 “마이바흐 HL120V” 12기통 엔진으로 교체하고 1943년 5월까지 허가를 가지고 있던 9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페르디난트“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쿠르스크 전차전 이후에 남은 페르디난트를 개조하여 기관총을 탑재하고 이름을 엘레판트(Elefant)로 바꾸게 되는데 전차승무원들은 기어를 변경할 필요가 없어 조종하기가 수월하고 고장 많은 변속기가 없어서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쿠르스크 전차전

 

전시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더욱 군의 심사에 불합격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정치적인 수완(?)으로 보급할 수 있었던 포르쉐의 VK4501(P)전차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판 방산비리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방산비리는 장비를 사용하는 장병들로부터 불만이 높거나 아예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인 반면 포르쉐가 만든 전차는 장병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히틀러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

히틀러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제4기갑사단 사령관과 제3기갑군단 사령관을 지냈으며 최종계급이 기갑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이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치인의 지휘는 받을 수 없다고 히틀러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했던 진정한 군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다.

1892년 5월 16일 동프로이센의 피슈하우젠(Fischhausen)에서 태어난 자우켄의 정식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두아르트 카지미르 디트리히 폰 자우켄(Friedrich Wilhelm Eduard Kasimir Dietrich von Saucken)’인데 여기서는 줄여서 폰 자우켄으로 부르기로 한다.

어린 그에게서 예술가적 기질을 발견했던 그의 어머니와 학교장의 추천으로 어려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0년 10월 1일, 폰 자우켄은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사단에 배속되어 동부전선에서 많은 무공을 세우며 1914년 10월에는 2급 철십자장을, 1916년에는 1급 철십자장을 받는 등 큰 활약을 하였고 1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자유군단 소속으로 근무하다가 1921년에는 국가방위군에 입대하여 1927년 특수임무를 띠고 소련에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다.

1934년 소령으로 진급하고 1939년 6월 1일에 대령이 된 그는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제4기갑사단의 자동차여단을 지휘하여 프랑스 공방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참가하였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사단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나 진급 다음 날 볼호프 부근에서 중상을 입고 제4기갑사단장 직을 전임자에게 다시 넘기게 되지만 이때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으며 1943년 4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6월에 제4기갑사단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어서 1944년 1월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27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상한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1944년 5월에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후 제2군 사령관에 취임한 폰 자우켄은 러시아가 승리의 날이라고 부르는 1945년 5월 9일, 탈출을 위해 준비된 비행기의 탑승을 거절하고 붉은군대의 포로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1955년 석방되기까지 독방에 감금되어 강제노동은 물론이고 수많은 고문을 받으며 비인도적인 포로생활을 한 결과 여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던 폰 자우켄은 1980년 9월 27일 당시는 서독이었던 뮌헨 인근의 풀락(Pullach)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이 간략하게 살펴본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의 약사인데 지금부터는 히틀러에게 반항을 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1945년 2월에 히틀러를 뺀 모든 독일군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대놓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발언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한 달 뒤인 3월 10일에 제2군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제2군은 나중에 동프로이센군으로 이름이 바뀐다. 아무튼 3월 10일에 복귀한 폰 자우켄은 3월 12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게 되는데 당시는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영향으로 히틀러를 접견하는 절차와 방식이 무척 까다롭게 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히틀러를 접견할 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폰 자우켄에게 있어서 기병대칼(사브르)은 그가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한 세월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는 칼을 차고 갔던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폰 자우켄은 한술 더 떠서 나치식 경례가 아닌 일반적인 군사경례를 함으로써 당시 벙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말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폰 자우켄을 부른 히틀러는 무슨 수를 써더라도 제2군을 지휘하여 동프로이센을 방어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대관구(Reichsgau Danzig-West Prussia) 지도자(가우라이터: 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우켄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어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미 히틀러를 만나면서 첫째, 칼을 차고 갔고 둘째, 단안경(monocle)을 쓰고 있었고 셋째,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3가지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었기에 아마도 폰 자우켄이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는 것이 벙커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란 히틀러의 명령에 폰 자우켄은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소리치면서 히틀러를 몰아붙였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볼장 다 본 셈이었는데 폰 자우켄은 히틀러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나의 총통(마인 퓨러: Mein Fuhrer)’ 대신에 ‘히틀러씨(헤르 히틀러: Herr Hitler)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린 셈이었으나 나치의 중우정치를 극도로 싫어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으로서는 군인에게 정치인의 명령을 받으라는 지시는 무엇보다 심한 수치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구나 폰 자우켄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히틀러는 꼬리를 만 것인지는 몰라도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지 말고 당신이 직접 지휘하시오!”라고 말했고 히틀러와 악수도 하지 않고서 돌아서 나오며 폰 자우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2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늦어서 휘하장병들과 주변에서는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폰 자우켄은 부상병들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영웅도 아니고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와 마찬가지로 존경의 대상도 아니지만 군인의 신념에 충실하고 권위에 저항했던 것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사족을 덧붙이면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톰 크루저가 맡았던 배역이 바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