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정식명칭이 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인 미국 해안경비대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6·25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이지만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또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미국의 법률로 지정하고 있는 군대의 단위에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함께 해안경비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해안경비대가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대통령의 명령이나 의회의 결정으로 해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1790년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제청으로 1790년 8월 4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창설되었던 해안경비대는 일부 자료에 의하면 관세밀수감시청(US Revenue Cutter service)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정보는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설될 당시,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던 해안경비대는 별도의 이름이 없이 커터(The cutters) 또는 커터 시스템(The system of cutters)으로 불리다가 1860년대까지는 징세해상부대(revenue marine)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에는 세관감시부(Revenue Cutter Service)로 불렸고 1915년 1월 28일에 미국인명구조부(Life Saving Service)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1798년 프랑스와 벌어졌던 ‘유사전쟁(Quasi War)’의 참전을 필두로 이라크전쟁에도 참전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이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 3만5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가 해군의 소속이 아닌 독자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참가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광복 직후 해군의 창설을 목적으로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성된 해사관계 군사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의 단장이었던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요청으로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 대위가 이끄는 병력이 1946년 8월 23일 내한하여 자문과 지도를 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나라의 해군으로 정식발족을 앞두고 있던 그 해 5월에는 미국해안경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이 한국에 도착하여 미국해안경비대의 지휘관 겸 고문관의 역할을 맡게 된다.
손원일 제독과 윌리엄 아처치
그러나 대한민국이 정식 해군의 발족을 앞두게 되자 다른 나라의 해군을 훈련시키는 것은 해안경비대의 임무가 아니란 결정에 의해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병력은 모두 귀국하게 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들이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8월 19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이자 미국해안경비대의 전 사령관이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최고고문관의 임무를 맡게 되고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은 대표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대한민국 해군이 사용할 선박문제로 대만을 방문하고 있을 때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들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공수해야 하는 물자의 선적을 마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과 재회하게 되고 1950년 7월,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주로 펄스전파를 이용하는 항법장치인 로란(LORAN)기지국의 설치·운영과 무선중계기의 설치 및 병력의 해상구조가 주요임무였다.
부산에 있었던 로란(LORAN)기지국
미국해안경비대가 한국전쟁 동안 수행했던 수많은 해상 인명구조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1953년 1월 18일 있었던 미 해군의 해상초계기 P-2V넵튠의 격추사건을 들 수 있다.
중공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을 비행 중이던 P2V 초계기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바다에 추락하고 승무원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 미국해안경비대는 필리핀의 해군기지(US Naval Station Sangley Point)에 주둔하고 있던 베테랑 조종사,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가 조종하는 구조기와 미치 페리(Mitch Perry) 중위가 조종하는 지원기로 2대의 수상비행기(PBM-5G)를 급파하여 생존자의 구출에 나서게 된다.
P-2V넵튠
현장에 도착한 수상비행기(PBM-5G)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물에 의지하고 있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착륙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고 기상이 좋지 않아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험이 높아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착륙을 감행하게 된다.
무사히 바다에 착륙한 비행기는 해군초계기에 탑승하고 있었던 총 13명의 승무원 중에서 생존자 11명을 태우고 이륙을 시도하게 되는데, 떨어져 있던 2명의 생존자는 해변으로 밀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PBM-5G
11명의 초계기 생존자와 본인을 포함하여 8명의 PBM-5G 탑승자 등 모두 19명을 태우고 이륙하려던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5m가 넘는 파도와 초속 24m에 달하는 강풍으로 쉽게 이륙하지 못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륙 보조 로케트(JATO bottle)’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륙과 동시에 엔진 이상으로 PBM-5G는 다시 바다로 추락하게 되고 밤이 되어서야 해군의 구축함 USS Halsey Powell(DD 686)에 의해서 구조가 되지만 초계기 P-2V넵튠에 타고 있던 4명의 해군과 PBM-5G에 탑승하고 있던 5명의 해안경비대원은 목숨을 잃고 만다.
USS Halsey Powell(DD 686)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및 유엔군 참전 유공자들을 청와대의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아직 완전한 종전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북미 간의 비핵화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고,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