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10대 잔학학행위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중국인과 몽골인들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하고 전쟁이 끝나자 그나마 살아있던 150여 명까지 모두 죽임으로써 흔적을 말살하려 했던 731부대의 만행도 있지만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본 일본군의 잔악행위는 우리와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도 같은데 다양한 주제를 Top10의 형식으로 발표하는 리스트버스(Listverse)가 선정한 일본군이 2차 대전 당시에 저지른 잔악한 행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본다.
※ 10 Japanese Atrocities From World WarⅡ
▶ 10위: 라하 비행장 대학살(1942년 2월)
네덜란드령 동인도(난인: 蘭印) 공략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1942년 1월부터 인도네시아의 암본 섬 (Ambon)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주둔하고 있던 호주와 네덜란드군의 저항으로 소해정이 침몰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총 4회에 걸쳐 300여 명의 호주와 네덜란드군인들을 일본도로 참수하였다.
종전 후 군사재판에서 90여 명의 일본군이 기소되고 4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 9위: 알렉산드라 병원 대학살(1942년 2월 14일 ~ 15일)
1942년 2월 8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싱가폴 공격은 11일 연합군의 항복으로 끝을 내게 되는데 싱가폴을 함락하기 직전 알렉산드라 병원에 근무하던 어린 인도병사가 일본군에게 발포한 것을 빌미로 병원을 습격하여 의료진과 환자를 가리지 않고 도살하였다.(원문에 도살(slaughtered)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후 남은 생존자들을 청소를 하기 위해 모두 모이라고 하여 비좁은 방에 몰아넣고 총검으로 찔러 200여 명을 학살하였는데 빗물 배수관에 몸을 숨긴 5명만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 8위: 팔라완 대학살(1944년 12월 14일)
1944년 12월 14일 필리핀의 팔라완 섬을 수비하던 일본군은 미군이 침공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고 미군포로들이 이에 동조하여 후방에서 자기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미군포로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이고 도망가는 포로들은 총으로 사살하였는데 150명의 포로들 중에서 12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고나서부터 미군은 일본군의 감옥과 포로수용소를 공격하는 해방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결과 489명의 미군과 필리핀 민병대와 33명의 민간인을 구조하게 되었다.
▶ 7위: 나우루 강점기 대학살(1942년 8월 ~ 1945년 9월)
1942년 8월부터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던 남태평양의 나우루 섬을 1943년 3월 미국이 폭격을 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주군 포로 5명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섬에 거주하던 1,000여 명의 원주민을 강제로 다른 섬에 이주하도록 추방하였으며 39명의 한센병 환자들은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게 한 다음 함포사격으로 침몰시켜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6위: 구축함 아키카제 대학살(1943년 3월 18일)
일본군은 뉴기니를 침공하여 섬의 동쪽 지역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곳은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독일인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인 등 유럽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 민간인 포로들을 구축함 아키카제(秋風)에 태워 이송하던 도중 “간첩혐의가 있다.”는 빌미로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60명이 넘는 인원을 임시로 만든 교수대에 손목을 묶어놓고 총으로 쏘거나 매질하여 죽인 다음 바다에 던져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구축함 아키카제(秋風)가 1944년 11월 필리핀 해상에서 어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자세한 진상을 밝히지 못하게 되었다.
▶ 5위 영국 상선 비하르호 대학살(1944년 3월 18일)
1944년 3월 일본의 중순양함 토네(利根)호는 인도양에서 영국의 상선 비하르(Behar)호를 격침시켰는데 함장이었던 마유즈미 하루오(黛治夫)는 바다에 빠진 108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구출하여 이송하면서 이 사실을 제16전대 사령관 산콘쥬 나오마사(左近允尚正) 제독에게 보고하였는데 나오마사는 불필요한 일을 했다고 마유즈미를 질책하고 모두 사형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마유즈미는 포로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러 번의 부탁을 나오마사 제독에게 하였으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포로들을 36명, 72명으로 분리하여 비하르 호의 선장이 포함된 36명은 다른 배에 태워 풀어주고 72명의 포로들은 모두 참수하여 그 시체를 바다에 버리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산콘쥬 나오마사(左近允尚正)는 직접 살해를 결정하였다고 해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토네(利根)호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黛治夫)는 병사들에게 살해를 지시하기는 하였으나 살인에 반대하였다는 사실이 참작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 4위: 싱가폴 숙칭 대학살(1942년 2월 ~ 3월)
숙칭(Sook Ching)은 숙청(粛清)을 의미하는데 싱가폴을 점령한 일본군이 거주하는 중국인 저항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헌병을 동원하여 이들을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숙청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농촌지역에서 자행된 만행이 극에 달하여 전체마을을 완전히 없애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과 싱가폴의 희생자 통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일본에서는 전체 희생자의 규모를 5,000 ~ 6,000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반해 싱가폴과 중국에서는 30,000 ~ 100,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3위: 잠수함 I-8 대학살(1944년 3월 8일 ~ 7월 2일)
I-8은 I-7과 더불어 2차 대전 이전에 개발된 일본의 잠수함인데 1944년 3월 26일 스리랑카의 콜롬보 연안으로부터 수 백 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네덜란드 화물선(Tsijalak호)을 발견하고 침몰시킨 후 103명의 생존자를 탑승시켜 칼과 망치를 이용하여 학살하고는 그래도 살아있는 생존자들은 갑판에 버려둔 채로 잠수하여 오직 5명만이 살아남았다.(죽일 생각이라면 그냥 바다에 버려둘 일이지, 굳이 승선시킨 다음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닝기리~)
그런데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난 몇 달 뒤에 또 다시 똑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번에 희생된 배는 미국의 화물선(Jean Nicolet호)이었다.
일본군은 총검으로 고문하고 살해하여 시체를 바다에 버렸는데 그들이 연합군의 항공기를 발견하고 잠수할 때에는 갑판에 30명의 포로들이 생존해 있었으나 구조된 인원은 단지 2명에 불과하였다.
▶ 2위: 버마(현 미얀마) 철도공사(1942년 6월 ~ 1943년 10월)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라고 불리는 버마 철도(Burma Railway)는 인도로 진격하기 위한 해상로가 영국에 의해 끊기게 되자 병력과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육로를 개척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건설된 것이 미얀마와 태국을 연결하는 415km에 달하는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이다.
1년 동안의 공사를 위해 일본군은 6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포로들과 20만 여명에 달하는 아시아인들을 징집하였는데 전쟁포로 13,000여 명을 비롯하여 강제로 동원된 민간인 노동자 8만~10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1957년에 개봉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가 그것이다.
▶ 1위: 마닐라 대학살(1945년 2월 ~ 3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필리핀의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였을 때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는 마닐라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도시가 아닌 시골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등 2명이 독자적으로 마닐라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미군이 상륙하였다는 사실에 그들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는 그에 대한 분풀이를 필리핀 민간인들에게 하기 시작하였는데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이고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참수하기도 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이 항복할 수 있도록 폭격을 중지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만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모두 10만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