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의 신분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공군의 원수에까지 올랐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를 꼽을 수 있는데 1933년 헤르만 괴링에 의해 국가항공부의 서기관에 임명될 때에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괴링의 명령으로 그의 개인기록을 변조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중앙이 에르하르트 밀히
서열상으로는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가 유대인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에서 나치에 협력을 한 사람이지만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람으로는 히틀러의 운전사였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꼽을 수가 있다.
1897년 1월 19일, 프랑스 이민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19년 12월 1일에 나치당(NSDAP)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1920년 1월에 교부하기 시작했던 501번으로 시작하는 당원번호가 히틀러는 그의 저서에서 507번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555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594번을 교부받았다.
에밀 모리스(Emil Maurice)
이것을 계기로 히틀러와 에밀 모리스는 친분을 맺게 되고 1920년에 창설된 돌격대의 전신인 경호·경비대의 최고지도자(Oberster SA-Führer: Supreme SA Leader)에 오르게 되는데 SA는 약자로서 돌격대(Sturmabteilung)를 뜻한다.
그리고 이어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21년 7월부터는 히틀러의 개인운전사가 되는데 1923년 3월에는 친위대의 전신이 된 히틀러의 개인경호부대의 대원이 되어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 실패 이후 정치범으로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교도소(Landsberg Prison)에 수감되게 된다.
수감 당시의 사진: 맨 왼쪽이 히틀러, 그 옆이 모리스
히틀러는 수감기간 동안 그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부관이었던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최선봉에서 투쟁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둘 사이의 막역함을 너(Du)라는 호칭을 서로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이름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인물의 하나인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눈 1925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던 경호대인 슈츠코만도(Schutzkommando)의 대원으로서 히틀러의 전용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 때 에밀 모리스는 히틀러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과 사귀게 되고 1927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게 되지만 히틀러는 에밀의 예상과는 반대되는 반응을 보인다.
겔리 라우발(Geli Raubal)
모리스의 예상과는 달리 히틀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대신에 헤어질 것을 요구했고, 1927년 연말에는 에밀 모리스를 운전기사에서 해고 하고 당에서도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느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을 해고하고 탈당까지 시킨 히틀러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나치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보상금으로 500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를 받게 되고, 이를 밑천으로 뮌헨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던 것은 아니고 친위대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었는데 1925년 11월 9일에 친위대로서 흔히들 SS라고 부르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이 조직되었을 때 1번 대원이 히틀러였고, 2번 대원이 바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였던 이유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1932년 친위대가 확장·재조직 될 때 모리스는 친위대의 고위간부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조직의 창시자라는 상징성에 대한 예우였을 뿐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고 1933년에는 뮌헨 시의원이 되어 같은 해 10월에 열렸던 뮌헨폭동 기념식에서 히틀러와 재회하여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1929년부터 친위대를 이끌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최고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친위대의 대원번호가 168번이었는데 1933년부터는 모든 친위대의 대원들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어야만 한다는 요건을 만들어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혈통을 증명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1935년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결혼을 하기 위해 혈통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 히믈러는 모리스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이자 배우 겸 감독으로 유명한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리 모리스(Chéri Mauric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에밀 모리스의 증조부인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임을 인지한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이 사실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당과 친위대에서 추방할 것을 제안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1937년부터 뮌헨의 상공회의소장을 역임하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독일의 공군에서 근무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군의 주도로 나치당이나 친위대의 대원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속했던 조직을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탈나치화(Denazification)의 일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48년 4년형의 선고와 함께 보유자산의 30%를 몰수당하게 된다.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막역한 친분을 쌓고 그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그의 최초의 직업이었던 시계기술자의 경력을 살려 시계점을 운영하다 1972년에 사망하였다.
비록 15년으로 감형이 되기는 했으나 종신형을 언도받았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오늘의 주인공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보면서 요즘 우리사회의 뜨거운 화제인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을 생각하게 되지만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에 관한 생각은 적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