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제4기갑사단 사령관과 제3기갑군단 사령관을 지냈으며 최종계급이 기갑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이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치인의 지휘는 받을 수 없다고 히틀러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했던 진정한 군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다.
1892년 5월 16일 동프로이센의 피슈하우젠(Fischhausen)에서 태어난 자우켄의 정식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두아르트 카지미르 디트리히 폰 자우켄(Friedrich Wilhelm Eduard Kasimir Dietrich von Saucken)’인데 여기서는 줄여서 폰 자우켄으로 부르기로 한다.
어린 그에게서 예술가적 기질을 발견했던 그의 어머니와 학교장의 추천으로 어려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0년 10월 1일, 폰 자우켄은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사단에 배속되어 동부전선에서 많은 무공을 세우며 1914년 10월에는 2급 철십자장을, 1916년에는 1급 철십자장을 받는 등 큰 활약을 하였고 1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자유군단 소속으로 근무하다가 1921년에는 국가방위군에 입대하여 1927년 특수임무를 띠고 소련에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다.
1934년 소령으로 진급하고 1939년 6월 1일에 대령이 된 그는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제4기갑사단의 자동차여단을 지휘하여 프랑스 공방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참가하였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사단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나 진급 다음 날 볼호프 부근에서 중상을 입고 제4기갑사단장 직을 전임자에게 다시 넘기게 되지만 이때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으며 1943년 4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6월에 제4기갑사단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어서 1944년 1월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27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상한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1944년 5월에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후 제2군 사령관에 취임한 폰 자우켄은 러시아가 승리의 날이라고 부르는 1945년 5월 9일, 탈출을 위해 준비된 비행기의 탑승을 거절하고 붉은군대의 포로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1955년 석방되기까지 독방에 감금되어 강제노동은 물론이고 수많은 고문을 받으며 비인도적인 포로생활을 한 결과 여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던 폰 자우켄은 1980년 9월 27일 당시는 서독이었던 뮌헨 인근의 풀락(Pullach)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이 간략하게 살펴본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의 약사인데 지금부터는 히틀러에게 반항을 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1945년 2월에 히틀러를 뺀 모든 독일군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대놓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발언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한 달 뒤인 3월 10일에 제2군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제2군은 나중에 동프로이센군으로 이름이 바뀐다. 아무튼 3월 10일에 복귀한 폰 자우켄은 3월 12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게 되는데 당시는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영향으로 히틀러를 접견하는 절차와 방식이 무척 까다롭게 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히틀러를 접견할 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폰 자우켄에게 있어서 기병대칼(사브르)은 그가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한 세월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는 칼을 차고 갔던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폰 자우켄은 한술 더 떠서 나치식 경례가 아닌 일반적인 군사경례를 함으로써 당시 벙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말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폰 자우켄을 부른 히틀러는 무슨 수를 써더라도 제2군을 지휘하여 동프로이센을 방어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대관구(Reichsgau Danzig-West Prussia) 지도자(가우라이터: 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우켄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어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미 히틀러를 만나면서 첫째, 칼을 차고 갔고 둘째, 단안경(monocle)을 쓰고 있었고 셋째,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3가지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었기에 아마도 폰 자우켄이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는 것이 벙커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란 히틀러의 명령에 폰 자우켄은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소리치면서 히틀러를 몰아붙였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볼장 다 본 셈이었는데 폰 자우켄은 히틀러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나의 총통(마인 퓨러: Mein Fuhrer)’ 대신에 ‘히틀러씨(헤르 히틀러: Herr Hitler)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린 셈이었으나 나치의 중우정치를 극도로 싫어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으로서는 군인에게 정치인의 명령을 받으라는 지시는 무엇보다 심한 수치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구나 폰 자우켄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히틀러는 꼬리를 만 것인지는 몰라도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지 말고 당신이 직접 지휘하시오!”라고 말했고 히틀러와 악수도 하지 않고서 돌아서 나오며 폰 자우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2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늦어서 휘하장병들과 주변에서는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폰 자우켄은 부상병들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영웅도 아니고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와 마찬가지로 존경의 대상도 아니지만 군인의 신념에 충실하고 권위에 저항했던 것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사족을 덧붙이면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톰 크루저가 맡았던 배역이 바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