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와 마크 트웨인
“기적이 일어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앤 설리번(Anne Sullivan) 선생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헬렌 켈러에게 설리번 선생님을 소개해준 사람은 전화기의 발명자(최초는 아님)이자 미국 AT&T 사의 설립자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었습니다.
헬렌 켈러와 그레이엄 벨
헬렌 켈러와 그레이엄 벨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디스 세인트 조지(Judith St. George)가 쓴 책 “Dear Dr. Bell…Your Friend, Helen Keller”이 “헬렌 켈러와 벨 박사의 위대한 만남 안녕하세요, 벨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헬렌 켈러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본명이 사무엘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인 사람의 필명입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란 필명은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필명인데 이 필명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젊은 시절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수부로 있다가 27세(28세라고도 함) 때 도선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강의 수심을 측정하기 위해 무거운 추가 달린 줄을 떨어뜨려 수심을 재었는데 그 때 수부가 수심을 재고 “Mark 10(수심 10)”, “Mark 20(수심 20)”이라고 소리를 질러 알리곤 했는데 이것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생전에 헬렌 켈러는 마크 트웨인에 대하여 “벨 박사와 설리반 선생님 외에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분은 없다.”고 말을 했으며 마크 트웨인은 헬렌 켈러에 대하여 “19세기는 두 명의 위인을 낳았다. 하나는 나폴레옹 1세이고, 다른 하나는 헬렌 켈러다. 나폴레옹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지만, 헬렌 켈러는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삼중고를 짊어졌으면서도 마음의 풍요로움과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거둔 것이다”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94년 헬렌 켈러가 14살 때 마크 트웨인의 친구인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의 편집장 로렌스 휴턴(Lawrence Hutton)의 집에서 있었던 파티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경 쓴 사람이 로렌스 휴턴
그 후 관계를 지속해오다가 헬렌 켈러가 지금은 하버드 대학(당시의 하버드는 남자학교였다)에 흡수된 당시의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에 합격하게 되자 마크 트웨인은 부유한 자기의 친구인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의 헨리 로저스(Henry H. Rogers)에게 헬렌의 지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 헬렌 켈러가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책과 강연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던 마크 트웨인은 페이지 컴퍼지터(Paige Compositor)라는 기계에 자신과 아내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자산(당시 30만 달러)을 투자하여 날림으로써 상당한 곤궁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헬렌 켈러를 직접 지원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에 관하여는 “부자가 되지 않는 방법(How Not to Get Rich)”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헬렌 켈러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의 입학시험에 합격을 하고도 이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코넬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입학한 전례가 없다.”는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해서 헬렌 켈러는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과 헬렌 켈러는 그야말로 아버지와 딸과 같은 나이차가 있었는데 마크 트웨인의 막내딸은 헬렌 켈러와 같은 188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막내딸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더욱 헬렌 켈러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던 것은 아닌지 하고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은 아내 올리비아 클레멘스(Olivia Clemens)와의 사이에 모두 4명의 자녀를 두었었습니다.
올리비아 클레멘스
그러나 첫째인 아들은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으며 그 후로 3명의 딸을 얻었는데 그 중의 막내가 바로 헬렌 켈러(1880년 6월 27일생)보다 한 달 후에 태어난 장 클레멘스(Jane Lampton “Jean” Clemens: 1880년 7월 26일생)였습니다.
막내 장 클레멘스는 15세 무렵부터 뇌전증(흔히 간질이라고 함)을 앓기 시작했는데 막내딸의 뇌전증과 헬렌 켈러의 장애가 마크 트웨인에게는 같은 무게와 느낌으로 다가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의 아내 올리비아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막내 딸과 함께 생활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1904년 그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마크 트웨인과 두 명의 언니들에게 맡겨진 막내 장 클레멘스는 결국 1906년에 뇌전증을 치료하는 시설로 보내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마크 트웨인의 비서였던 이사벨 라이온(Isabel Lyon)의 간계가 숨어 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겠습니다.
1909년이 되어서야 마크 트웨인은 비서인 이사벨 라이온(Isabel Lyon)의 횡령과 거짓을 알게 되어 그녀를 해고하고 그해 4월에 막내딸을 집으로 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리운 집으로 돌아온 막내딸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욕조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게 되는데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키는 와중에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과 막내딸 장 클레멘스
헬렌 켈러의 나이 12살 때 쓴 단편소설 “프로스트 킹(Frost King)”이 “마가렛 캔비(Margaret Canby)“”의 소설 “프로스트 페어리즈(Frost Fairies)”를 표절한 것이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무죄판결을 얻었다는 사실을 헬렌 켈러가 쓴 자서전을 통해서 10년 후에야 알게 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의 말들은 대부분이 표절이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그녀를 응원하는데 그 때가 1902년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둘째 딸 수지 클레멘스(Susy Clemens)가 1896년 수막염으로 사망하면서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막내딸이 사망하고 난지 불과 4개월 뒤인 1910년 4월 21일에 아내와 마찬가지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뇌전증을 앓던 막내를 두었으며 사랑하는 둘째 딸을 1896년에 떠나보내야만 했던 마크 트웨인에게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헬렌 켈러가 딸처럼 생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딸과 같은 헬렌 켈러였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