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합사(合絲)는 정확히는 여러 가닥의 실을 합쳐서 꼬임을 주어 빔실로 만든 실이라는 뜻을 가진 합연사(合撚絲)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여기서도 통상적으로 부르는 합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하면서 합사가 아닌 PE라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낚싯줄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1992년 최초로 PE라인이 세상에 선을 보인 이후부터 독점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일본의 특허는 대부분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취득한 것들이어서 이제는 기한의 만료로 일본의 기술을 따르지 않아도 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도 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토요보(Toyobo)는 지금까지 다이니마(Dyneema)란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던 것을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창조신 부부인 남편 이자나기(伊邪那伎)와 아내인 이자나미(伊邪那美)에서 따와 2016년 4월 1일부터는 이자나스(IZANAS)라는 브랜드로 판매를 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달갑지 않다.

그러면 지금부터 합사(PE라인)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다이니마(Dyneema)란 이름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부터 알아보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이니마(Dyneema)는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UHMW-PE)으로 만든 제품으로 네덜란드의 DSM과 일본의 토요보(東洋紡)가 함께 개발한 것인데 DSM에서는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다이나미(Dynami)와 섬유를 뜻하는 이나(Ina)를 결합하여 Dynema로 만들었으나 일본에서 ‘니’는 2를 뜻하는 발음과 같으므로 E를 1개 더 넣어 Dyneema로 하자는 토요보(東洋紡)의 제안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토요보(東洋紡)는 무슨 이유로 다이니마(Dyneema)가 아닌 이자나스(IZANAS)란 브랜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의 경제계와 낚시업계는 물론 학계와 정부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토요보(東洋紡)가 새로운 브랜드인 이자나스(IZANAS)로 영업을 전개하는 첫째 이유는 토요보(東洋紡)가 판매하는 다이니마 제품과 네덜란드 DSM이 판매하는 다이니마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이유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급속하게 성장하는 반면에 모방품이 끊이질 않고 있고, 셋째 이유는 보유한 특허의 기한 만료로 독점적인 위치를 누릴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한 3가지 문제를 일본 토요보(東洋紡)는 어떻게 돌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일본 군마대학(群馬大学)의 공과대학원에서 분자과학과 교수를 맡고 있는 히로키 우에하라(上原宏樹)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은 우에하라 교수의 논문 요약본에서 캡처한 것임

 

히로키 우에하라(上原宏樹)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UHMW-PE)을 모노필라멘트 방식으로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2016년 제42회 일본 섬유학회상을 수상하였는데 토요보(東洋紡)가 다이니마(Dyneema)에서 이자나스(IZANAS)로 브랜드를 변경하기로 한 것도 2016년의 4월의 일이며, 게다가 히로키 우에하라(上原宏樹)는 관련기업으로부터 개발과 제휴를 받았으며 지금은 실제로 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힌 것에서 충분히 수긍이 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해보면 토요보(東洋紡)는 1세대 합사라 할 수 있는 다이니마(Dyneema) 의 시장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을 차세대 합사라 할 수 있는 모노필라멘트로 만든 제품으로 확고히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관련 논문을 보지 못하고 요약본만 본 상태지만 기존의 모노필라멘트로 만든 합사(PE라인)는 기존 제품보다 2배나 강한 강도를 가지며 PE라인의 가장 큰 단점인 연신율도 크게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한다.

 

■ 합사 개발의 역사와 주역들

다이니마(Dyneema)는 슈퍼섬유로 분류되는 매우 가볍고 강한 섬유로 네덜란드의 화학회사인 Royal DSM N.V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일본의 토요방적주식회사(東洋紡株式会社: 줄여서 토요보)의 생산기술에 의해 공업화된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 섬유로 그 역사는 1963년부터 시작된다.

DSM의 정식 명칭은 코닝크릭크(Koninklijke) DSM N.V이며 DSM의 앞에 붙어 있는 코닝크릭크(Koninklijk)는 영어로 로얄(Royal)이란 뜻을 가진 네덜란드어로서 특정기업이나 단체에 붙여주는 명예 호칭이다.

1963년, DSM에서 폴리머의 기초연구를 하고 있던 알버트 J. 페닝스(Albert J. Pennings: 이하 페닝스)와 그의 동료는 폴리에틸렌을 상온에서 결정화시키는 기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때 발견된 기술로는 상업화할 정도의 생산량을 얻지 못했으며 매우 균질한 폴리에틸렌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1964년에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1966년에는 폴리에틸렌을 시트 형태로 결정화시키는 방법의 특허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DSM의 중앙연구소에서는 폴리에틸렌 섬유를 어느 분야에서 제품화할 것인지 명확하게 정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제조 시설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기초연구를 지향하였으므로 결정의 구조와 성질을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이처럼 기초연구에의 지향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유럽의 기업들에게는 일반적이었던 일로서 페닝스가 결정화 방법을 발견한 섬유에 대하여 DSM의 전사적(全社的)인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기초연구에 집중하던 방침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경제환경의 악화로 인해 DSM 중앙연구소의 기초연구 예산이 크게 삭감된 결과, 폴리머 기초연구부문의 인원은 25명에서 15명으로 대폭 감축되었는데 페닝스도 그로닝겐대학교(University of Groningen)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DSM은 페닝스의 연구에 계속해서 자금을 지원하여 관계를 유지하지만 페닝스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폴 스미스(Paul Smith)가 DSM의 연구소에 입사하게 되면서 페닝스와 DSM이 결별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폴 스미스(Paul Smith)는 연구소 동료인 피에트 렘스트라(Piet Lemstra)와 함께 겔 방사법을 개발하였는데 바팅이 되는 아이디어는 페닝스가 오랫동안 연구하였던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DSM은 1979년 스미스와 렘스트라가 개발한 겔방사법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여 1980년에 인증을 받는다. 그리고 DSM과 페닝스 사이에는 이 특허의 소유권에 관한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고 당연히 페닝스와 DSM의 관계는 종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분쟁 끝에 겔방사법의 특허는 DSM이 보유하게 되었다.

겔방사법을 쉽게 표현하면 열이 아닌 용매로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을 녹인 다음 그것을 노즐에서 밀어내고, 겔 상태의 섬유에서 용매를 제거하여 섬유를 뽑아내는 기술인데 알버트 J. 페닝스(Albert J. Pennings)와 DSM의 역사와 합사의 개발에 대한 역사를 오늘 모두 다루기에는 너무 장황한 포스팅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일정 부분의 시간은 뛰어넘기로 하고 DSM이 토요보(東洋紡)와 손을 잡은 얘기를 하기로 한다.

 

■ DSM과 토요보(東洋紡)의 제휴

1980년대에 들면서 DSM은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경영전략을 수정하여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시하는 사업영역으로 제품 포트폴리오의 이행을 도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81년에는 새로운 폴리에틸렌 섬유를 DSM이 자체적으로 생산할 것인지 라이선스로 생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로에 서는데 1982년의 실적악화는 사업 파트너를 찾아야만 하는 것으로 진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 악조노벨(Akzo Nobel), 얼라이드 시그널(Allied Signal)과 같은 경쟁업체에서도 동일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사업화가 임박했다는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DSM은 적을 동지로 만들기 위해 악조노벨(Akzo Nobel), 얼라이드 시그널(Allied Signal)에 제휴를 제안하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만다.(거절이란 표현이 일부 맞지 않을 수도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포스팅에서 다룰 계획임)

이로 인해 DSM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합성섬유의 세계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DSM이 잘 알지 못하는 아시아·오세아니아 시장에 대해서도 정통한 일본의 토요보(東洋紡)로부터의 제휴를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토요보(東洋紡)로서는 1970년대의 오일쇼크로 인해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섬유사업은 더 이상의 확장은 무리가 있다는 결론에 따라 비섬유 사업으로의 확대와 해외진출의 확대를 꾀하면서 감량 경영과 함께 연구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던 시기여서 1984년 DSM과의 공동개발계약을 체결하고 1985년에는 고강력 폴리에틸렌 섬유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P-13그룹을 발족시키기에 이른다.

이어서 토요보(東洋紡)는 1985년 12월 1일에는 DSM과 조인트벤처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회사로 네덜란드에 Dyneema VOF를 설

립하고 1986년 5월 14일에는 합작회사로서 다이니마 재팬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 운 좋게 잡게 된 PE라인 시장의 주도권

1993년은 토요보(東洋紡)가 합사(PE라인)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아주 운이 좋은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토요보(東洋紡)는 미쓰이석유화학공업(三井石油化学工業)이 제조하는 테크밀론(TEKMILON: テクミロン)을 두고 특허권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1993년에 양사가 화해협정을 맺으면서 미츠이석유화학공업은 철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토요보(東洋紡)가 유일한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 섬유업체가 된다.

그런데 미쓰이석유화학공업의 철수가 토요보에 미친 영향은 단순하게 경쟁제품이 시장에서 사라졌다는 점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장의 주도권도 함께 넘겨받는 행운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토요보와 미쓰이가 크게 경쟁을 벌이지 않았던 장갑과 낚싯줄 시장에서는 미쓰이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미쓰이가 철수하면서 기존 거래업체의 공급권도 자연스럽게 토요보로 넘어오게 되었는데 낚싯줄을 생산하는 대기업 2곳에 테크밀론(TEKMILON: テクミロン)을 공급하고 있던 미쓰이에 비해 기타 중소규모의 메이커에 소량을 납품하는 것에 그치고 있던 토요보는 합사(PE라인)의 단일 공급자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고센에는 테크미(TECMY: テクミー)라는 이름의 제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 글을 맺으며.

다이니마(Dyneema)는 해외의 원자재 메이커와 높은 기술력을 가진 섬유기업과의 합작에 의해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한 이노베이션이며 이런 콜라보의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DSM의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의 삭감에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토요보(東洋紡)가 가지고 있던 기술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회가 오면 잡을 수 있도록 탄탄한 기술력을 지닌 낚시용품 관련업체는 국내엔 어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