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기준으로 3,320억 원의 매출을 올려 세계 4위의 낚시용품업체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핀란드의 라팔라(Rapala)란 기업의 사명(社名)은 1905년에 태어난 창업자인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낚시용품 업체들 중에서 라팔라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먹먹할 때가 가끔씩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어깨를 짓눌렀을 가장이라는 책임을 누구보다 충실히 이행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총을 들고 싸웠던 평범하면서도 책임감 강한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인생역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면 지금부터 세계적인 낚시용품업체 라팔라(Rapala)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1905년에 핀란드의 쉬스메(Sysmä)에서 태어난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는 7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아시칼라(Asikkala)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며 이사를 할 때에도 어머니와 단 둘이만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라고는 이름이 칼레 스텐(Kalle Sten)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으로 이마저도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며 그의 생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어머니는 부유층의 하녀로 일을 하면서 그를 키웠고 처음에는 성도 없이 그냥 라우리로만 불렸던 그가 라팔라(Rapala)란 성을 얻었던 것도 그에게는 행복한 기억이진 않았을 것 같다.
새롭게 이사를 한 아시칼라(Asikkala)로 교적(敎籍)을 옮기면서 이름을 기록할 때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어머니(Maria Eerikintytar)의 성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성직자가 그들이 떠나온 마을의 이름인 라팔라(Rapala)를 성으로 기록함으로써 라우리는 뜻하지 않게 라팔라(Rapala)를 성으로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핀란드어로 진흙을 뜻하는 라팔라(Rapala)를 성으로 갖게 된 라우리(Lauri)는 평범한 당시의 여느 아이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삶의 전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육체노동 밖에는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남성들의 의무복무를 규정하고 있는 핀란드의 법률에 따라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는 1925년 9월 11일에 군에 입대하여 1926년 9월 3일에 제대를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게 되고, 복귀 후 힘든 일상 속에서도 엘마 레파넨(Elma Leppanen)이란 여성을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마침내 1928년 9월 29일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가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유럽 전체에 불어 닥친 경기침체와 미국의 대공황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기에 라우리는 겨울에는 벌목공으로, 여름에는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면서 힘든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
결혼 후 모두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던 라우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낚시용품의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금전적인 것이 가장 컸다.
어느 날 자신이 잡은 3.5㎏ 정도가 되는 송어 3마리를 판매한 금액이 2주일 동안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받는 금액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에 아마도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는 옳다구니 하면서 무릎을 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라우리는 물고기가 먹이를 어떻게 먹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 다양한 관찰과 연구를 거듭하였고 마침내 1936년에 코르크에 은박지를 감싸서 만든 최초의 라팔라 루어를 만들게 된다.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
한편 1939년이 되면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으로 겨울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전쟁 이전부터 식량난이 심각했던 핀란드의 일반가정과는 달리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는 그가 만든 루어를 이용하여 많이 잡은 날은 270㎏에 달하는 물고기들을 낚시로 잡을 수 있어서 식량문제를 별로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루어를 제작하는데 사용했던 코르크가 부족하게 되자 라우리는 벌목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소나무껍질을 사용하여 루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의 위기는 라우리를 다시 군에 입대하게 만들었는데 군에서도 루어의 연구에 몰두했던 라우리는 직접 만든 루어를 동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다가 어느 날 다이너마이트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루어를 이용하여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내기에서 훨씬 많은 78마리를 잡으면서부터 이 소문이 핀란드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알지만 겨울전쟁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겨울전쟁은 모두 542명의 소련군을 저격하여 세계최고의 저격수로 이름을 남기며 하얀 사신(White Death)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시모 해위해’가 활약한 바로 그 전쟁을 말한다.
그러나 겨울전쟁은 1940년 3월, 평화협정의 체결로 끝을 맺고 나치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핀란드는 다시 독일과의 전쟁에 뛰어들게 되고 라우리는 몇 년을 더 복무한 뒤 6년 만에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그가 만든 루어의 인기가 핀란드에 널리 퍼져 주문이 쇄도하고 있어서 라우리는 그의 아들들에게 루어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게 되었는데 3남 엔시오(Ensio)가 만든 것은 핀란드 최고의 장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팔라(Rapala)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업체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최대의 시장인 미국에서의 높은 인기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고 그 이면에는 물론 좋은 루어를 만든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으나 운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부인할 수만은 없다.
1952년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제15회 하계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이 때 참가한 미국선수단 중에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페이옌네 호수(Lake Päijänne)에서 낚시를 하기 위해 방문한 낚시점에서 라팔라 루어를 구입하여 써본 결과 아주 좋은 조과를 올리는 바람에 귀국하면서도 많이들 사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핀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제품들은 라팔라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그냥 ‘핀란드 플러그’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지금의 라팔라가 있게 만든 주인공의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론 웨버(Ron Weber)라는 미국인이 낚시여행을 하던 도중 미네소타 주의 덜루스에서 라팔라 루어를 이용하여 낚시를 하는 사람이 아주 쉽게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론 웨버(Ron Weber)
낚시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론 웨버는 낚시용품점을 운영하고 있던 친구 레이 오스트롬(Ray Ostrom)에게 그가 발견한 라팔라 제품을 보여주면서 함께 테스트를 했고 “이것은 반드시 대박이 날 것이다.”는 확신으로 1959년 9월 23일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에게 정식으로 수입을 의뢰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 2월, 첫 번째 주문으로 2,400개의 루어를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1961년까지 모두 31,135개의 제품을 수입하였으나 이 양은 대박났다고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의 대박은 1962년 여름에 그들 곁으로 다가오는데, 1962년은 유명한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36세의 나이에 자살함으로써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해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마릴린 먼로의 일대기를 다룬 기사가 당시 최고의 잡지인 라이프지 8월호에 게재가 되었는데 바로 그곳에 라팔라의 제품을 소개하는 기사가 ‘A Lure the Fish Can’t Pass Up’란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한글로 번역하면 물고기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도 뛰어난 루어란 의미)
1960년부터 1961년까지 2년 동안 미국으로 수입한 라팔라 루어를 모두 합쳐야 고작 3만 개를 조금 넘었는데 마릴린 먼로의 기사가 실린 잡지에 함께 소개됨으로써 론 웨버(Ron Weber)와 레이 오스트롬(Ray Ostrom)이 받은 주문량은 2년간 수입한 양의 100배에 달하는 3백만 개였다고 한다.
이에 론 웨버(Ron Weber)는 핀란드로 쫓아가 생산량을 늘여줄 것을 부탁하면서 너무도 큰 주문량에 놀란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가 원활하게 공급하기에는 생산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재정지원을 제안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라팔라 루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획기적으로 늘면서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의 고향마을인 라팔라에는 은행의 지점이 개설되었다고 하니 지역경제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는 1974년에 세상을 떠났고, 론 웨버(Ron Weber)는 2012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팔라(Rapala)제품의 시장성을 발견하고 미국으로 수입했던 론 웨버(Ron Weber)는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번 돈을 좋은 곳에 기부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는데 오늘은 라팔라의 역사를 알아보는 첫 순서이니 이쯤에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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