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1945년 5월 10일,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방법으로 적기를 격추시킨 일이 일어났는데 주인공은 바로 미해군 조종사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으로 그는 조종하던 F4U 콜쎄어(F4U Corsair)기의 프로펠러로 일본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전과를 올린 로버트 클링맨은 한국에서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1934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4년을 복무한 후에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날 다시 재입대하여 항공정비사 교육을 거친 다음 조종사가 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배치 받은 곳은 1945년 4월 1일 시작되어 81일간이나 이어진 태평양 최대의 전투였던 일본의 오키나와 전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었던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등장했는데 7번에 걸쳐 1,500기에 달하는 숫자의 특공기가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원된 함정(총 77척의 연합군 항공모함과 9척의 전함이 동원되었다)을 비롯하여 4월에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하여 점령한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과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 등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어 미군은 함재기를 동원한 정찰활동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s)은 요미탄 비행장이라고도 부르며 1996년 7월에 폐쇄하고 2006년 12월에 일본정부에 반환되었으며 현재도 운용되고 있는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은 한국전쟁을 맞아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은 극동지역의 중요한 미군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

 

미군의 통계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일본 가미카제 특공기의 70~80%는 사전에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는 하나 20~30%에 달하는 숫자만으로도 연합군 측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는데 1945년 5월 4일에만 12척의 전함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899명에 달하는 사망·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도 이런 가미카제 특공기를 정찰하고 격추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몰던 미해병대 전투비행대(VMF-312)의 함재기 F4U 콜쎄어(Corsair) 기종은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 기종에 비해서 고도가 낮고 항속거리가 짧아서 격추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F4U 콜쎄어(Corsair)

 

특히 일본은 미국의 B-29의 폭격으로 본토가 공습 당하자 B-29의 고고도에 이르지 못하는 “Kawasaki Ki-45 토류”를 경량화 시키기 위해 기관포와 방탄철판 및 무전기를 제거하고 공중에서 B-29의 기체와 부딪히게 하는 가미카제와 같은 방법으로 격추시키기 위한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라는 공대공특공대를 별도로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강력한 B-29의 방어화기와 9,000m에 도달하기까지 40분이나 걸리고 고고도에서는 수평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성능차이 때문에 일본이 노리던 효과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Kawasaki Ki-45 토류

 

특히 방탄철판을 떼어낸 “Kawasaki Ki-45 토류”에 비해서 기체의 강도가 월등했던 B-29는 기체충돌 공격을 받고도 무사귀환하는 일도 있었으며 이후에는 P-51(P-51 Mustang)기가 호위를 하게 되면서부터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사라지게 되었는데 미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야간이라 고도를 낮추어 공습했던 5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친 동경공습 경우에는 출격한 B-29기 17대와 26대가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945년 5월 10일에도 “켄 리우서(Ken Reusser)”를 편대장(레드1: 켄 리우서, 레드2: 로버트 클링맨, 레드3: 짐 콕스, 레드4: 프랭크 래스튼)으로 하여 다른 3명의 조종사와 함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F4U 콜쎄어(Corsair)를 몰고 정찰임무를 하러 나갔습니다.

일반적인 전투순찰비행의 경우에는 고도를 3,000피트로 유지하지만 코드명 “디나(Dinah)” 별칭 “Nick”으로 불리던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를 정찰하기 위해서 고도를 13,000피트로 유지하던 도중에 고도 2,5000피트에서 접근하는 Ki-45를 발견한 편대장의 무전에 따라 속도를 높여 접근하면서 고도를 3만 8천 피트까지 높이는 바람에 짐 콕스와 프랭크 래스튼이 조종하던 레드3, 4는 아래에 처지게 되었고 편대장 케네스 리우서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둘만이 Ki-45에 근접하게 됩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편대장 켄 리우서는 고도를 높이기 위해서 비행기에 장착되어 있던 캘리버 50(M2 Heavy Barrel: MG50으로도 부른다)을 발사하여 비행기의 무게를 줄일 것을 명령하고 고도 3만 8천 피트에 이르러서야 2차 대전 당시 프로펠러 비행기들이 적기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일컫던 도그파이트(dogfight)를 벌이기 위해 “Kawasaki Ki-45 토류”의 50피트 뒤에서 꼬리를 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높은 고도에서의 기동은 간결하고 정확해야만 하고 사소한 문제로도 비행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근접하여 사격을 해야 했지만 정격고도보다 3천 피트나 높은 고도를 유지하는 바람에 불과 몇 번의 사격 이후에 총이 얼어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때 편대장 켄 리우서는 Ki-45의 우측에서 기동을 방해하고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위에서부터 Ki-45의 꼬리를 자신이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의 프로펠러로 부딪혀 손상시키기로 하는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다시피 한 이 행동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첫 번째 시도에서 Ki-45의 방향타에 경미한 손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Ki-45의 후방 기총공격에 의해 오른쪽 날개가 명중되지만 비행에는 문제가 없어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두 번째로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 Ki-45 후방 기관총이 떨어져나가게 되고 기총수는 비행기에서 튕겨져 나가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만 추락시킬 수는 없었기에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다시 한 번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세 번째 공격에서 드디어 Ki-45의 꼬리가 떨어져나가면서 추락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지만 그가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 또한 프로펠러가 떨어져나감으로써 통제를 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도 1,000피트에 이르러 가까스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고도 1만 피트에서 연료는 이미 소진되었지만 편대장 켄 리우서의 유도에 의해 무사히 기지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미국화가 “Alex Durr”가 그린 것이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알렉스는 9년 동안 해병대에서 전투기를 조종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로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미해군이 수여하는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전쟁에도 항공관제사로 참전하였고 1966년에 예편하였습니다. 한편 편대장이었던 켄 리우서(Kenneth L. Reusser)는 한국전쟁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고 베트남전쟁에는 16 해병항공대(Marine Aircraft Group 16)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2차 대전을 포함하여 3개의 전쟁에서 생존한 유일한 조종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지만 베트남전쟁에서의 구조작전 도중에 타고 있던 UH-1 휴이(UH-1 Huey)가 총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면서 입은 화상으로 말미암아 피부의 35%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 끝에 27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68년에 대령으로 예편을 하였으며 2009년 6월 20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Alex Durr가 그린 그림의 복사본에 서명하는 켄 리우서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무모한 것 같은 이런 공격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며 그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은 1899년에 쥘 베른(Jules Verne)의 “정복자 루버(Robur the Conqueror)”라는 공상과학 소설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용감한 조종사들이 수행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Aerial ramming”이라고 하는 램어택은 1911년 9월 8일에 세계최초로 일어났는데 이 기록을 작성한 사람은 세계최초의 루프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한 러시아의 피요트르 네스트로프(Pyotr Nesterov)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로젠탈 남작이 조종하던 알바트로스 B.II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는데 당시 피요트르가 조종하던 비행기는 정찰임무를 위해 비무장이었기 때문에 격추시키기 위해 램어택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조종사와 정찰병은 추락하여 사망하였으며 피요트르 또한 다비행기에서 떨어질 때의 부상으로 다음날 사망함으로써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러시아 공군에서는 총알이 없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도록 장려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이 벌인 독소전쟁(1941∼45)에서만 약 600차례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