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자동차회사 푸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으며 마침내는 공장을 직접 폭파하여 항거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언론사의 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푸조자동차가 나치독일에 항거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장을 직접 폭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나치에 대한 항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명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었음을 모르는 내용의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푸조(PEUGEOT)가 공장을 폭파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조자동차의 생산공장은 1925년부터 1929년에 걸쳐 소쇼(Sochaux)지방에 집중되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는 6만 명이 넘는 인원이 근무하는 대단위 공장이었습니다. 이처럼 규모가 큰 생산시설이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영국의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에서는 자체발전설비를 갖추고 있는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독일군의 지배하에 놓인 푸조자동차는 일부 언론에서 사실관계의 확인조차 없이 작성한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생산을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며, 10대를 생산하면 6대의 차량에서 불량이 나오도록 하는 소극적인 사보타지(sabotage)를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3년 봄에는 독일의 V1 미사일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에 숙련공들이 차출되어 V1 미사일에 사용될 부품을 제작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의 SOE에서는 더욱 푸조의 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43년 7월 15일 밤에 공군참모장 Charles Portal와 “왕립공군 폭격사령부”의 사령관 Arthur Harris의 지휘로 “헬리팩스 폭격기(Handley Page Halifax)”가 출격하여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하였고, 귀환한 조종사들은 푸조의 공장이 평탄하게 변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정확하게 확인된 바로는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한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던 4개의 마을을 폭격하는 바람에 민간이 125명이 사망, 2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가옥 100여 채가 파괴되고 400여 채가 넘는 가옥이 피해를 입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빗나간(?) 일부의 폭탄만이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에 떨어졌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폭격에 실패하자 영국의 SOE는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푸조의 생산라인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기 전인 1943년 4월에 프랑스로 공중침투하여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협력하고 있던 SOE 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이 실패하고 대신에 민간인 희생자들을 내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게 되어 SOE본부에 폭격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출하고 직접 다른 시도를 하게 됩니다.
언론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장 피에르 푸조 3세”가 나치에 협력하지 않으려고 단독으로 공장폭파를 결정했던 것이 아니고 동생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를 만나 설득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의 노력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의 동생이자 공장의 기술책임자를 맡고 있던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에게 전화를 건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자신은 영국의 요원이며 현재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을 계획하고 있는데 공장을 폭격하면 민간인의 희생도 뒤따르게 되니 직접 폭발물을 설치하여 폭파하는 것이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
처음에는 해리 리(Harry Ree)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푸조 측에서는 영국에 무선조회를 하여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자신들의 손으로 폭파한 공장의 파괴된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에 따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림에 따라 공장의 직원으로 변장한 Harry Ree는 낙하산으로 증원된 SOE요원들과 합류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장비와 폭약을 공장에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최초의 시도는 축구를 하는 독일군 경비병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1월 5일 두 번째 시도에서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폭파는 성공적이어서 공장의 육중한 철문이 20미터 이상 날아오를 정도였으며 더 이상 푸조자동차의 소쇼(Sochaux)공장은 생산라인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Harry Ree와 SOE요원들은 며칠 동안 더 폭파를 계속하여 독일군들에 의해 사용될 수도 있는 작은 부품들까지도 폭파시켰습니다.
SOE주도의 성공적인 폭파작전은 폭격기를 통한 공중폭격을 막아 민간인들의 희생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푸조자동차의 경영진들의 결정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한편 폭파에 성공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게슈타포의 포위망을 피해 총상을 입은 몸으로 스위스로 피신하여 영국으로 귀환하였으며 1947년 SOE요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다큐영화 “School for Danger”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고 1962년에는 요크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활동하다가 19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School for Da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