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개방한 지 하루만인 5월 11일 청와대 관저 뒤편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일명 미남석불로 불리는 불상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알려졌다.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는 이 불상을 경주로 반환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은 미남석불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불상의 영욕(榮辱)을 추적해본다.

인용하는 신문의 기사 중 한자표기만 있는 것은 한글을 병기하였고, 일제 강점기 일본식 한자표기를 따른 기사는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는 안내와 함께 얘기를 시작해본다. 1967년 4월 30일 조선일보 3면에는 “이번에 石佛(석불)이 말썽 낳고…”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던 것들이 선거(選挙) 때만 되면 정치적(政治的)으로 곧잘 이용(利用)되곤 해왔는데, 이번에는 청와대(靑瓦臺) 약수(薬水)터에 있는 석불(石仏) 하나가 말썽의 씨가 됐다.

이 석불(石仏)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서울을 이왕조(李王朝)의 수도(首都)로 자리를 정할 때 세운 보잘것없는 것인데 이승만(李承晩)씨나 윤보선(尹潽善)씨가 대통령(大統領)으로 재임(在任)했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지난 19일 청와대(靑瓦臺)를 개방한 이래 몰려온 45만 명의 상춘객(賞春客)들에게 애완(愛玩)되었던 것.

그런데 선거(選挙) 때라서 그런지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과 이 석불(石仏)을 관련시켜, 박대통령(朴大統領)은 불교(仏敎)와 가깝다느니, 따라서 기독교(基督敎)를 싫어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청와대비서실(靑瓦臺祕書室)은 잔뜩 긴장.

한 비서관(祕書官)은 『어린이 상춘객(賞春客)에게 매년 한 자루씩 주어오던 연필 한 자루와 공책 한 권도 금년에는 선거(選挙) 때라고 해서 안주고 있는데, 석불(石仏)을 정치적(政治的)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푸념.

바로 이 기사에 나오는 석불이 오늘의 주제인 미남석불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도 이전부터 해오던 봄철 꽃놀이 시기의 청와대 개방을 중지하지 않고 실시했으며 이에 관한 자료는 1963년 4월 27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414호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도 오늘 포스팅의 주제인 미남석불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일어난 이후론 청와대를 일반에 개방하는 행사는 더이상 개최되지 않게 되었고 1974년 1월 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긴 했으나 시민들은 미남석불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4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잇따른 사건사고가 김영삼대통령이 미남석불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난무해지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관저 뒷산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공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의 종교문제가 가라앉지 않자 청와대는 조계종 스님 8명을 초청하여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에 관한 기사는 1996년 9월 7일자 한겨레의 23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적인 이유로 언론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미남석불은 2018년 4월 20일 보물 제1977호로 승격되었고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경주에 있던 미남석불은 어떻게 해서 청와대로 옮겨졌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이기환의 역사흔적을 기고하고 있는 이기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 1934년 3월 29일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그래서 기사를 찾아보았다.

釋迦如來像(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美男石佛) 櫛風浴雨(즐풍욕우)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大樹下(대수하)에,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博物舘(박물관)에서 垂涎萬丈(수연만장)이란 대소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이에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하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의 1934년 3월 28일자에서는 매일신보보다 하루 앞서 미남석불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석불의 행방을 온 힘을 다해 찾던 27일에야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 거짓말이란 것으로 1934년 3월에 석불이 발견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조선총독부의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1912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경주를 방문하였다.

그 목적은 경주에 산재한 조선의 보물을 수탈하기 위함이었는데 봉덕사종 앞에서 찍은 당시의 사진은 1912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실려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장을 맡기도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당시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보다 앞서 초대 경주분관장을 맡고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를 안내했는데 이자는 박물관장이라기보다는 도굴꾼이란 명칭이 더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었다.

모로가 히데오에 대해서는 조금 뒤 자세히 알아본다.

아무튼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란 필명으로 특히 신라의 문화와 경주의 유물과 고적에 관한 집필을 많이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1934년 3월 31일자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12년 데라우치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미남석불은 경주금융조합의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에 옮겨져 있는 상태였고, 이것을 본 데라우치가 감탄을 거듭하자 고다이라가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7년 12월 3일자 한겨레신문은 단독으로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발견한 미남석불과 관련한 사진을 공개했는데 이에 따르면 1913년 2월 남산의 총독관저로 옮겨온 석불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데라우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데라우치 이후 조선총독들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부터는 경주를 방문하면 시바타여관에 머물곤 했는데 여관 앞에는 구리하라(栗原)라는 골동품가게가 있었고, 골동품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돈이 많을 것 같으면 시바타여관의 주인인 시바타 단쿠로(柴田団九郎)를 연결해주었고, 시바타 단쿠로는 그들을 다시 경주박물관장이던 모로가 히데오에게 연결시켜주는 커넥션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신라의 문화재를 밀반출하는 일이 얼마나 잦았고, 얼마나 크게 이루어졌으면, 1933년 4월 28일에는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에 구속되기에 이르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하였고 동아일보는 3꼭지로 나누어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제목을 한 번 보도록 하자.

1. 신라(新羅)때 진품(珍品)을 도매(盜賣) 玉虫帳(옥충장)도 부지거처(不知去處) 【경주박물관장장물압수사건(慶州博物舘長贓物押收事件)】 속칭(俗稱) 경주왕(慶州王)의 말로(末路).

2. 발각(發覺)의 단서(端緖)는 고적도굴사건(古蹟盜掘事件)

3. 경주(慶州)를 좌우(左右)튼 유일(唯一)의 권력가(權力家)

 

재판에 넘겨진 모로가 히데오는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과 함께 벌금도 1심보다 크게 감액된 2백원이란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조선의 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골동품 밀매업자에 불과한 모로가 히데오를 위로하는 손편지를 직접 보냈다는 것이 공개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1920년 11월에 경주를 처음 방문하였는데 앞에서 얘기한 시바타여관에 묵으면서 모로가 히데오를 알게 되었고 이후로 모로가 히데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촉탁이 되어 경주의 고적에 대한 보존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경주박물관장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임하기에 앞서 조선의 유물을 대장에 기록하고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하였는데, 정작 그의 관저에 보관하고 있던 미남석불은 대장에 수록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이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는 미남석불이 유물을 관리하는 장부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을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의 수사를 받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조사에 나서면서 총독관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남석불을 관저로 반입한 뒤 승려를 불러 예불을 올릴 정도로 총독의 관심을 받았던 유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처럼 수난의 역사를 지닌 미남석불은 청와대의 개방과 함께 석불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본향을 떠나야만 했던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이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인이 디자인한 의상을 “한복을 재해석한 것을 입고 청와대에서 화보를 촬영한 것”이라 답하는 문화재청장과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