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모습

벨기에의 서플랑드르 주의 예페르(Ieper)는 흔히 프랑스어인 이프르(Ypres)로 불리는데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에서는 5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두 번째 전투에서 독일군이 독가스를 사용하여 역사상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 벌어진 곳이라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하여 연합군을 공격한 것이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1914년 8월에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공격할 때 최루가스를 사용한 것이 기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2차 이프르 전투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몇 개의 전투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연합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대부분 프랑스군과 알제리군 및 모로코군이 피해를 당한 ‘그라펜스타펠 능선 전투(Battle of Gravenstafel Ridge)’와 캐나다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를 들 수 있다.

영국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처음으로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이 있었던 4월 22일에만 약 1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서 캐나다군은 총 5,975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이 중에서 약 1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수많은 연합군들이 독가스로 사상을 당하자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벨기에의 루스(Loos)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Loos)에서 독일군에게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가스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는 연합군과 독일군을 합하여 모두 8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의 염소가스 사용을 독일군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던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는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제국의 군사행동에 찬성한다는 ‘93인의 성명서(Manifesto of the Ninety-Three: Manifest der 93)’에 이름을 올렸고, 참호전투에서 연합군을 참호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루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적극적인 제안을 독일군에게 하였다.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의 제안은 즉시 현장실험을 거치게 되는데 이 실험을 관찰한 끝에 최루가스 대신에 염소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프리츠 하버(Fritz Haber)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에 앞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프리츠 하버(Fritz Haber)’ 역시도 독일의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이 독일의 군사행동을 찬성한다고 하는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염소가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독가스를 개발 또는 합성했던 일로 인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군에 공한한 바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1934년 나치에 의해서 독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로 전시내각에서 화학부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는지는 몰라도 역시 같은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는 남편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독일군의 철저한 지지자로 독가스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남편에 대해 과학이념의 왜곡이자 야만적이라고 반대하며 비난까지 했던 그녀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주도로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가스가 사용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이 벨기에로부터 돌아온 직후인 1915년 5월 2일, 남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물론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의 자살의 동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녀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행동이 원인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가 자살을 한 다음날에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러시아에 대한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의 아내가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한 것에 이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당한 그와는 달리 나치에 의해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그의 친척들은 그가 개발한 치클론 B(Zyklon B)라는 독가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불행을 겪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한편 5,975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 참전한 캐나다군(1st Canadian Infantry Division)은 이전의 식민지부대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유럽열강을 이긴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과 숨져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인트 줄리안 기념관(Saint Julien Memorial)’에는 11미터(36피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그 꼭대기에는 캐나다군 병사의 흉상이 장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