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본의 무조건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8일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가 하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망한 안소니 마키오네는 2차 세계대전 최후의 사망자가 되었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군 조종사 고마치 사다무(小町定)는 종전 후에도 살아남았는데 그가 일으킨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2차 세계대전은 자칫하면 끝나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고마치 사다무(小町定)
전쟁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보다는 천황제의 유지가 최대 관건이었던 일본의 수뇌부에서는 항복을 두고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궁성사건(宮城事件)”이라고 불리는 쿠데다 미수사건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밤부터 8월 15일 새벽 사이에 육군성의 일부세력과 근위사단 참모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일본천왕이 항복하는 내용을 육성으로 녹음한 것의 탈취를 기도하는데, 이 사건은 1965년에 혼도 카즈토시(半藤 一利)에 의하여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운명의 8월 15일: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運命の八月十五日)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1967년과 2015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2015년작 ”일본 패망 하루 전“이란 제목의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미육군 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는 이런 일련의 항복에 반대하는 움직임 중의 하나인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으로 말미암아 전사하게 됩니다.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항복에 반대하는 당시의 아츠비행장에 주둔하던 제302항공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가 항복에 반대하고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면서 항전을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휘하의 조종사들에게는 일본 상공에 출현하는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할 것을 지시한 사건을 말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고난 하루 뒤, 맥아더장군은 도쿄 상공으로 4대의 폭격기를 비행시켜 일본의 항복이 진정성이 있는가를 시험하게 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폭격기에 위해가 가해진다면 일본의 항복은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즉각 공중폭격을 감행할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까지 과연 휴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사진정찰 임무를 맡고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에 탑승한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별다른 사고 없이 도쿄 동쪽에 위치한 비행장(카토리와 코노이코)을 촬영하고 그날의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45년 8월 17일의 비행에서는 규슈해안을 따라 비행하던 도중 이를 발견한 일본 전투기 “가와사키 Ki-61”과 “나카지마 Ki-44”의 공격을 받아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는 경미한 손상을 입고 이를 격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미국은 2대 격추, 1대 손상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일본에서는 당일에 피해를 입은 비행기는 없다고 발표)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
가와사키 Ki-61
나카지마 Ki-44
그리고 운명의 1945년 8월 18일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일본 전투기의 공격으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고 함께 동승했던 미육군 병장 “조셉 라크라이트(Joseph Lacherite)”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은 아직 싸우려 한다고 판단하고 즉각 폭격을 개시할 생각이었으나 운이 좋게도 일본의 평화대표단이 맥아더를 다음날인 1945년 8월 19일에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에 맥아더는 만일 다음날 일본의 대표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판단에 따라 하루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일본대표단은 8월 19일 맥아더 장군을 찾아옴으로써 자칫 계속될 수도 있었던 연합군의 폭격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아츠항공대(厚木航空隊)의 사령관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휘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을 감행할 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에 부하장병들이 그를 8월 21일 아침에 마취시킨 다음 강제로 해군병원의 독방에 수감시키는 일이 발생하는데.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그 후 1945년 10월 16일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요코하마감옥에 수감이 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11월, 20년으로 감형을 받고 12월 5일에 가석방이 되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사면을 받았습니다.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의 사망으로 계속될 뻔했던 태평양전쟁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the Missouri) 선상에서 맥아더(MacArthur) 장군과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외상 사이에 일본의 항복문서가 정식으로 조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