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대회처럼 각국의 대표선수가 한 곳에서 자웅을 겨루는 대회뿐만 아니라 개별 종목에서 각 국가 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를 보더라도 1차대전 후의 정치 상황이 명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4년까지 프랑스 축구대표팀은 주로 1차대전 당시 연합국 또는 중립국 팀들과 경기를 가졌으며 아주 가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1차 대전의 적대국 대표팀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 독일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 반독일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10년 이상이 지난 1931년에야 처음으로 대항전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상황은 스포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으며 1차 대전 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스포츠계에 미치는 미국의 힘도 상징적이었다.
1917년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국토가 전장으로 되는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유럽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유럽의 국가들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1차 대전 후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잡게 되었다.
1편에서 언급했던 연합군 경기대회는 미국 육군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과 YMCA가 협력하여 유럽에 남아 있는 연합군 병사를 위한 스포츠 대회로 개최한 것이었다.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미국인 병사들은 파리의 방쎈느 산림공원(Bois de Vincennes)에 경기장을 건설했고 나중에 이 경기장은 프랑스에 기증되었는데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이라 명명되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사용되었다.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
연합군 경기대회에는 19개국에서 1,415명이 참가했지만, 그 중 282명이 미군, 253명이 프랑스군의 병사였던 것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의 참가는 해당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또, 미국 선수의 강인한 체격이나 선진적인 트레이닝 방법 등도 1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에게는 미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쳤다. 게다가 올림픽에 있어서도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은 계속되어 1차대전 이후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미국은 금메달을 획득한 수에 있어서 다른 나라를 계속 압도하였다.
이와 같이 1차대전 이후부터 정치성을 수반하며 발전해온 스포츠의 국제화는 프랑스의 주도에 의한 바가 컸으며 국제 스포츠계를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외교정책과 일치하며 프랑스 국내 스포츠계의 변화와도 상호 연관되어 전개되어 갔다.
1차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스포츠 관련 조직은 프랑스 스포츠연맹 (USFSA)으로 1890년 11월에 설립된 USFSA는 모든 스포츠를 일괄적으로 조직한 연맹으로 주요 가입자는 파리를 중심으로 귀족계급과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육상, 축구, 론 테니스(Lawn Tennis) 등 종목별 소위원회를 두었고 1901년 7월 1일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법이 통과된 이후로 많은 스포츠 클럽이 가입했는데 예를 들면 1890년에는 13개 단체와 2,000명의 회원수에 불과했던 것이 1차대전 직전에는 약 1,700개 단체와 회원수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한편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은 영국의 상류계급과 스포츠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스포츠는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했는데 쿠베르탱도 “스포츠를 노동자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USFSA는 그러한 상류층 및 중산층 사람들의 모임이며 엄격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이런 USFSA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기독교 카톨릭계 프랑스 파트로나쥬 체조스포츠연맹(FGSPF)이 설립되었는데 FGSPF는 USFSA의 헤게모니에 반대하여 조직된 프랑스 연맹간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의 핵심세력으로 1차대전 전에는 1,500단체, 15만 명의 등록자를 가진 주요 조직으로 성장했다.
FGSPF: Fédération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
이런 FGSPF에 대해 UFSFA는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스스로는 세속적·비종교적인 조직임을 주장했지만 갈수록 프랑스 스포츠계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되면서 쿠베르탱은 1906년에 USFSA의 명예회원으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USFSA나 각종 스포츠 종목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1907년 1월에 이듬해 열리는 런던 올림픽대회의 참가를 둘러싸고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전국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거부했다.
USFSA는 올림픽 참여에 대해 쿠베르탱과 전국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맹과의 논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미 1차 대전 전부터 쿠베르탱과 프랑스의 스포츠계 사이에는 스포츠에 대한 생각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07년 3월에는 FGSPF가 중심이 되어 USFSA에 반대하는 몇몇 그룹이 결집해 CFI를 결성하게 된다.
즉 올림픽에 대한 쿠베르탱의 영향력과 정치적 갈등을 깊게 하는 프랑스 스포츠계의 위기를 앞두고 각종 경기단체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지향하는 조직을 결성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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