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는데 스포츠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자국 대표선수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위신을 되찾는 수단으로서 스포츠에 주목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외에도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스포츠계에 퍼진 “한 경기종목은 하나의 연맹이 통괄한다”는 모델은 프랑스의 주도에 의해 국제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각국 정부는 스포츠에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국제정세가 올림픽대회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와 정치의 연결도 1차대전 이후 시작되었다.

실제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1920년 올림픽대회에는 1차 대전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 독일제국을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과 같은 동맹국들은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올림픽 역사에서 선수단의 참가를 불허한 최초의 배척이었다. 이처럼 스포츠계가 정치적 색조를 띠기 시작하는 가운데, 거기서 조직화를 주도한 것이 프랑스였다.

올림픽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논의되어왔으며 그 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비정치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을 경험한 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다.

1차 대전 후 프랑스 사회는 대중문화가 발전을 이루는 시대였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방편으로써 국민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전기가 일반 가정에 널리 퍼져나가는 것과 함께 라디오 방송이 크게 보급되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국화해가는 미국 영화의 상영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스포츠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1차 대전까지는 일부 사람에 한정되어 있던 스포츠였지만, 전후에는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것도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한 실제로 경기장에서 관전하는 것 외에도 라디오나 스포츠 전문 잡지, 혹은 신문의 스포츠란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경기결과를 알게 되었는데 스포츠 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유통량이 많았던 것은 일간지 로토(L’Auto)였다.

 

1903년에 투르 드 프랑스를 시작하고 있던 로토는 전쟁이 끝난 뒤 1923년에는 자동차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 대회의 주최나 후원에도 적극적이었고 그런 결과로 신문의 매출도 증가했다.

1923년에는 하루에 27만 7000부, 투르 드 프랑스의 개최 기간에는 하루에 50만 부 가까이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10년 후에는 평균 36만 4000부까지 발행 부수를 늘려나갔다.

이와 같이 1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의 스포츠는 정치화와 동시에 대중화도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 열렸던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가 바로 1924년에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8회 올림픽대회였다.

 

프랑스가 1924년 파리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쿠베르탱 남작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1920년의 앤트워프 올림픽에는 국제정세를 이유로 독일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가 참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스포츠계는 쿠베르탱이 주창했던 올림픽 정신과 평화적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이런 역사를 지닌 올림픽이 2024년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된 이후 지금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의 2024년 파리올림픽 참가를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순수한 스포츠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 올림픽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과 스포츠의 정치화 및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각국의 내셔널리즘이 명확하게 표출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은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에 걸쳐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로 펼쳐진 전쟁이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던 국가 간의 총력전이 되었다.

이 총력전의 경험과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한 배상이나 제국의 해체, 거기에 따른 영토 등의 지정학적 변화는 유럽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증폭시켜 국가끼리의 대항의식은 1차 대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 1월 10일에 국제적인 평화유지기구로서 국제연맹이 설립되어 상호 의존성과 통합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포츠계에서도 1차 대전 후에 국제적인 연결이 강화되어 국제 대항 경기가 적극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1차 대전 전까지는 대부분 대영제국에 속한 국가들과의 럭비 경기였지만 1차 대전 후에는 유럽 인근 국가와 육상경기 및 축구경기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를 둘러싼 국제적인 연결은 각국 팀 간의 상호 교류를 확대해가는 한편, 국가 간의 대항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스포츠가 여론을 집중시켜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정도의 영향력은 없었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을 둘러싸고 1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가장 다른 점은 스포츠에 국가가 대외적인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대회가 증가함에 따라 1차 대전 후 유럽 각국에서 국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크게 확대되었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높여준다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확대됨에 따라 스포츠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심과 대항의식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 1월 20일에는, 프랑스 교육성에 체육스포츠과가 설치되었으며 책임자로는 프랑스 스포츠연맹(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의 의장이었던 가스통 비달(Gaston Vidal)이 선정되었다.

가스통 비달(Gaston Vidal)

 

가스통 비달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추락한 프랑스의 위신을 스포츠를 통해 다시 세계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비달은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직전에 “스포츠는 국가의 사업이 되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1920년에는 프랑스 외무부가 해외사업부에 관광 및 스포츠부를 설치했는데 해외사업부는 말 그대로 국외를 향한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부서로 주된 업무는 IOC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 강화, 외국과의 경기 확대 및 국가대표를 영화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프랑스 정부는 스포츠를 국가의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유용한 선전도구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할 것으로 기대되어 정부가 관여하게 된 것에 따라 국제경기는 정치성을 수반하게 되었고 1차 대전 이후의 복잡한 국제 정치상황은 스포츠계에도 명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트워프 올림픽에도 1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들은 참가할 수 없었는데 그 외에도 베르사유조약의 조인과 같은 시기인 191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연합군 경기대회(영어: Inter-Allied Games, 프랑스어: Les Jeux interalliés)도 그 명칭 그대로 참가 팀은 1차 대전의 연합국에 한정되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