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일은 2010년에 제정한 의병의 날이 9번째를 맞는 날이었다. 우리는 의병을 생각하면 일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일본에게 있어서도 6월 1일은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날이다.
외적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들을 기리는 날인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일본에서 초연(初演)된 날이란 의의가 있다.
일본의 조선침탈이 기승을 부리던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데, 당시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중국의 칭다오를 조차지로 삼고 있던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병력과 무장에 있어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던 독일은 3개월이 되기도 전에 일본에 항복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4,715명의 독일군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전쟁에서 항복한 군인은 죽이지 않는다는 항군불살(降軍不殺)에 관한 제네바협약과, 포로가 되어 치욕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낫다는 일본의 풍조가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갑자기 수천 명에 달하는 포로가 생기게 되자 일본은 당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기화 되는 1차 대전으로 인해 포로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문제를 겪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독일군 포로들을 일본으로 이송하여 1914년 10월부터 일본 각지에 개설한 12개의 포로수용소에 나누어 수용을 하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로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것이 바로 오늘 얘기의 소재인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라는 곳이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2년 10개월 동안 1천여 명의 포로들을 수용했던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의 소장은 당시 44세였던 도요히사 마츠에(松江豊寿)란 사람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도요히사 마츠에(松江豊寿)에 대한 미화를 할 수밖에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가 포로들을 대우한 행동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극악한 행동에 비해서는 인도주의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수용되었던 독일군들은 대부분 지원병들로써 그들의 이전 직업은 아주 다양했고 수용소 내에서의 행동도 비교적 자유스런 편이어서 독일군 포로들은 채소를 재배함은 물론이고 빵을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팔기도 하고 마을사람들과의 교류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수용소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당시 독일 해군의 군악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28세의 음악을 전공한 헤르만 한센(Hermann Hansen)은 악단을 조직하고 1918년 6월 1일에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최초의 베토벤 제9번 교향곡의 연주회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일본은 발트의 낙원(バルトの樂園)이란 영화를 제작하여 2006년에 개봉하였는데 일본으로서는 그들을 미화하는 이 영화가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소개하는 국내의 포털에 있는 글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영화 발트의 낙원(バルトの樂園)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본인들이 초대되어 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1920년 1월 10일 베르사유 조약의 발효와 함께 모든 독일군 포로들이 석방되어, 그 해 4월 1일자로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는 폐쇄되었고 현재는 독일마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아 교향곡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나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들을 때면, 나라가 힘이 없을 때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의병들을 한 번쯤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