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흰색의 튤립 품종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품종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화훼구근정보센터(Flowerbulb Information Centre)에서는 1993년에 세상을 떠난 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튤립에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붙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의 헌신적인 유니세프의 활동과 배우로서의 경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튤립의 이름으로 사용한 일들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빙 크로스비, 퀴리부인, 존 F. 케네디와 같은~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는 오드리 헵번과 튤립의 특별한 인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인 아버지 조셉 빅터 안소니 러스턴(Joseph Victor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 귀족가문 출신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사이에서 192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가 안전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네덜란드의 아른헴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버지
그런데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모두 나치의 지지자들이었고 영국파시스트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그녀가 “로마의 휴일(1953년)”을 비롯하여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파리의 연인(1957년) 등을 히트시킬 당시에 알려졌더라면 그녀는 배우로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1926년 결혼을 하고 1935년에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파시스트 활동에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8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을 지지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괴벨스로부터 받은 사실이 탄로 나서 투옥되게 됩니다.
한편 안전할 것이라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예상과는 달리 네덜란드도 1940년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 때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오드리 헵번은 에다 판 헤임스트라(Edda van Heemstra)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이혼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가한 경험을 파시스트 잡지인 “The Blackshirt”에 기고하기도 하는 등 친나치의 행보를 보였지만 그녀의 외숙부는 독일에 저항하였다는 죄로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른헴음악원과 기숙학교에서 배운 발레를 이용한 작은 공연으로 돈을 모은 오드리 헵번은 이 돈을 레지스탕스에 전달하기도 하고 많은 당시의 네덜란드 어린이들처럼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연락을 전달하는 활동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영화 “로마의 휴일”의 스크린 테스트를 앞두고 그녀의 매니저들은 그녀의 부모가 나치를 지지하는 활동을 한 사실을 숨기려고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중 한 장면
촬영장소의 실제 모습
그러나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녀의 부모들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더욱 많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자,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인 오드리와 튤립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 네덜란드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독일의 점령을 방해하기 위해 철도파업을 단행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44년 겨울부터 독일군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식량과 연료의 보급을 차단하는 이른바 “네덜란드 기근(Dutch famine)”을 일으켰는데 참혹한 기근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22,000여명의 네덜란드인이 사망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급이 차단된 혹독한 겨울을 “굶주림의 겨울(Winter of Hunger)”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 오드리 헵번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풀을 끓여먹거나 튤립의 뿌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녀는 천식과 황달,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어 전쟁이 끝났을 때의 몸무게는 불과 40kg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튤립에 붙이는 것이 더욱 뜻 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Huis Doorn”에서 그녀의 이름이 붙은 튤립의 헌정식이 열렸고 궂은 날씨 속에서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첫 번째 튤립을 그녀의 숙모 재클린에게 바칩니다.
말년이 더욱 아름다웠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잘록한 허리는 어린 시절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아름다운 백색의 튤립은 그녀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정신과 더욱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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