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맺어졌던 두 번의 협력관계를 우리는 제1, 2차 국공합작이라고 부른다. 이 중 제1차 국공합작은 당시로는 규모가 작았던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등한 관계로 협력을 맺지는 못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 인해 장개석은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923년 8월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학교와 붉은 군대를 시찰하고, 특히 붉은 군대의 창립자인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으로 인해 장개석은 ‘붉은 장군(Red General)’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닉네임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1924년 6월 16일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개교하게 되는데 장개석은 이 학교의 초대교장을 맡아 소련의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뜬 학교체제를 만들었으며, 소련에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강의를 하거나 군사교육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개교식 모습
이렇게 탄생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는 한국인 입학생들도 많았는데 영화 ‘암살’로 조명을 받았던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도 이 학교의 4기생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장개석과 소련고문단과의 사이에 자주 마찰이 생기게 되면서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던 장개석은 소련의 지원이 실제로는 중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속셈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당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체포·연금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4월 11일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라는 비밀명령을 하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4·12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명령이었고, 이것을 두고 진압한 쪽에서는 숙청이나 정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반대쪽에서는 참안(慘案: 대학살)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을 1933년에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20일 동안에 1만 명이 처형되었던 까닭으로 서양에서는 ‘4·12 사건’보다는 ‘상하이 대학살(Shanghai Massacre)’로 불리고 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소련고문단은 추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되지만 장개석은 또 다른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장개석이 선택한 것이 바로 독일인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던 유럽의 강대국 독일이 가지고 있던 전쟁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하는 장개석의 속셈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식민지를 모두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감축해야 했으므로 실직한 군인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독일의 속셈이 서로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장개석은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게 군대와 민간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이에 응하여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맥스 바우어(Max Bauer)’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독일자문단(German Advisory Group)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천연두에 감염되어 중국에 온지 1년만인 1929년 5월 6일 사망하게 되고 후임으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이 부임하게 되는데 천연두로 숨진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중국 공산당원에 의해 인위적으로 감염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후임으로 부임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은 히틀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마지막엔 히틀러에 의해서 숙청되는 운명을 맞지만 당시에는 나치를 지원하는 우익 군사테러조직이었던 자유군단(Freikorps)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1930년에 국민당의 초청으로 ‘히틀러 청소년단(독일어: Hitlerjugend, 영어: Hitler Youth)’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독일과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게 된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독일 내에서는 중국과 일본 중에서 어디를 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나뉘게 된다.
장개석을 파시스트로 판단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중국과의 무기무역이 독일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친중국 정책을 주장하였고,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은 일본이 이념적으로 더 가까울 뿐 아니라 소련과의 적대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개석은 정치적인 인질의 신분으로 소련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의 서얼, ‘장웨이궈(蔣緯國)’를 독일에 보내어 사관학교를 마치고 1938년 3월에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합방하는 침공에까지 참여하게 만든다.
장웨이궈(蔣緯國)
하지만 독일과의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고자 했던 장개석의 생각은 일본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은 앞으로 중국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국민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1940년 9월 27일에는 주저하는 독일에게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의 체결을 제안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독일군의 지원이 일부나마 계속되고 있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인해 공산당과 손을 잡은 중국에 독일의 대한 지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루어진 3국 동맹으로 인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점령지에 대한 배분을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중국 공산혁명’이라고 하는 ‘제2차 국공 내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언론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여 대만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나치독일과 손을 잡았던 장개석의 정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과 마찬가지로 잔악한 행동을 무수히 저질렀으며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추축국의 일원인 독일과 동맹을 맺은 국민당정부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외침은 중국인민들의 공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장개석은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본토에서 쫓겨나기 이전인 1947년 2월 27일에 타이베이에서 정부의 전매품이자 독점품목이었던 담배를 허가를 받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하였다는 이유로 여성을 공무원들과 경찰이 폭행하는 이른바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 발생하고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2월 28일에 대만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만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에 더욱 반발한 민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시위대를 향한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내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격화되자 천이는 앞으로는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취하면서 뒤로는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천이의 요청을 받은 장개석은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2개 사단과 1개 헌병대를 파견하여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행동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는 그야말로 대학살이라고 할 수 있는 ‘2·28 사건’ 또는 ‘2·28대학살’의 원흉이 되고 만다.
이런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로 여겨졌으나 40주년을 맞은 1987년에 ‘2·28 사건’을 연구하는 모임이 결성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기에 이르게 된다.
대만 정부에서 공식사죄한 ‘2·28 사건’에 대하여 부정하는 망동을 일삼는 정치인이 없는 대만에 비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임을 깨닫게 되고, 망언을 일삼은 자들의 징계를 피하려는 정치권의 꼼수를 보면서는 정말 진정으로 머리가 좋고 국민들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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