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를 이용하여 아이작 월튼에 관한 604페이지로 이루어진 영문서적 1회독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래된 자료를 스캔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고어(古語) 표현과 활자체가 읽는데 시간을 걸리게 만든 것도 하나의 변명거리였다고 할까?
뿐만 아니라 인쇄하기 전에 교정(校正)을 보지 않았는지, 오탈자가 상당히 많은 것도 완독(完讀)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2/3 정도 읽은 상태에서 아이작 월튼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동안 아이작 월튼의 어린시절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으므로 이번에 새롭게 취득한 정보는 조금 더 고증(考證)을 거친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면서 오늘은 카더라 정보만 난무하는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의 직업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아이작 월튼의 정확한 출생지와 생일에 대해서 아직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신분이 낮은 하층계급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영문판 위키피디어에는 아이작 월튼의 아버지는 펍(pub)과 여관을 운영하였다고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티플러(tippler)였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 티플러(tippler)는 술은 팔지만, 식사는 제공하지 않으며 숙박시설이 없는 술집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키피디어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여관주인이었다거나 여관을 경영했다고 하는 것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두 달 전에 포스팅한 글을 통해 “아이작 월튼은 15세에서 20세 사이에 누나를 따라 런던에서 재봉사의 도제공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의 견습생이 되어 1618년 11월 12일에는 철기상(Ironmongery)조합의 자유조합원(freebrother)으로 가입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그린젤(Grinsell)이라는 성(姓)이다.
아이작 월튼의 직업에 대하여 철물상이라고 하는 부분은 현재까지의 조사에 의해서만 판단하더라도 틀린 것이라고 조심스레 지적할 수 있다.
10대의 나이에 런던으로 온 아이작 월튼은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경영하던 원단가게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누나에게서 일을 배웠는데 실질적인 주인은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었으므로 그의 밑에서 도제공(徒弟工: apprentice) 생활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철물상조합의 회원이었고 아이작 월튼도 나중에 매부의 도움을 받아 조합에 가입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어 그의 직업이 철물상이었다는 잘못된 정보들이 퍼져나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런던에는 예로부터 동업자 단체 및 길드로 구성되는 리버리 컴퍼니(Livery company)라는 것이 있는데 세분되는 업종만 100개가 넘으며 일반적으로 Worshipful Company of 업종명으로 표시를 한다.
이러한 리버리 컴퍼니(Livery company) 가운데 철물상들로 이루어진 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회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이작 월튼보다 12살 많은 매부였고, 그를 따라서 아이작도 나중에 가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작 월튼의 직업에 관한 영미권의 정보는 위키피디어를 비롯하여 어느 곳도 철물상이라고 얘기하는 곳은 없으며 저자에 따라 원단도매상(a wholesale linen draper)이었다거나 재봉사(Sempster), 혹은 여성용 모자를 제작·판매하는 사람(milliner)이었다고 함으로써 전부가 섬유와 관련한 업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작 월튼이 철물상조합의 회원으로 가입을 하기는 했지만 철물점을 운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주관적인 추론(推論)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아이작 월튼이 런던에 왔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시기는 그의 나이가 15세 되던 1608년에서 20세였던 1613년 사이였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이런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는 철물상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문서에 있다.
동문서에 의하면 “1618년 11월 12일, 토마스 그린젤의 도제공이었던 아이작 월튼은 조합의 가입을 허락받아 입회비 12펜스를 납부하고, 성실한 출석과 활동에 대한 이행보증금으로 10실링을 지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도제공(徒弟工: apprentice)이 보통 7년의 기간을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아이작 월튼이 조합원으로 가입하였던 1618년 11월 12일에는 그가 가진 자산(資産)이 철물점을 경영하기에는 모자라는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작 월튼은 철물상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조합원으로 가입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에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종 업종을 경영하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규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음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근거하면 아이작 월튼이 운영한 매장은 런던의 챈서리 레인(Chancery Lane)과 플릿 스트리트(Fleet Street)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아이작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던 것은 1617년 또는 철물상조합원으로 가입했던 1618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이것은 섬유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철물상조합원으로 활동하던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 밑에 적을 두고, 일은 누나에게서 배운 다음 독립하여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에만 근거하더라도 아이작 월튼이 철물상이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그의 직업이 철물상이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는 낚시업계와 낚시문화에 짙게 드리워진 일본의 그림자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직접 경험하거나 읽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카더라 정보를 양산하는 식자(識者)들의 잘못도 적지 않다는 것이 아이작 월튼과 조어대전을 연구하는 범부(凡夫)의 생각이다.
범부의 생각을 밝혔으니 하나만 더 덧붙이면 아이작 월튼은 정말 장가를 잘 갔다는 것이다.
아이작 월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 던(John Donne)의 보좌신부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아이작의 조카 사라 그린젤(Sarah Grinsell)과 결혼함으로써 상하의 귀천이 엄격히 분리된 시대에 상류층으로 쉽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없었더라면 아이작의 런던에서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김재식씨가 쓴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라는 책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인간관계를 생의 마지막까지 유지한 사람이 아이작 월튼이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인쇄기가 아주 드물었던 당시, 그의 명저(名著)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카사위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보좌신부로 근무하고 있던 성 던스턴 서부교회(St Dunstan-in-the-West)가 인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찬양에 가까운 전기(傳記)를 써주었던 존 던(John Donne)이 그 교회의 교구신부를 역임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라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을 맡아서 출판해주었던 출판사의 2세 경영인이었던 리차드 매리어트(Richard Marriot)와 그의 부친 존 매리어트(John Marriot)의 도움도 절대 간과할 수는 없다.
물론, 나중에는 아이작 월튼의 전문출판사로써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아이작 월튼은 특히 리차드 매리어트(Richard Marriot)에 대한 고마움을 그의 유언장을 통해 10파운드의 유산을 나누어주도록 명시하는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아이작 월튼에 대한 평가는 문학, 종교, 정치적으로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청교도혁명의 시기, 현실도피를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이 존재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가능하면 담백하게 그를 조명해보고, 마지막에는 그가 쓴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에 대하여 살펴볼까 한다.
재미는 없는 글이지만, 해야 할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만 달성하더라도 지금 연재하는 글의 성과는 달성하는 것일 테니 아무튼 계속해 볼 생각이다.
또한 “예술가로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낚시꾼으로 태어난 사람도 없다.”는 아이작 월튼의 말처럼,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다 보면 변해 있을 나의 새로운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재미없는 글이지만 계속 업글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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