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책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영어로 씌어진 책이 바로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쓴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이다.

그러나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그가 쓴 조어대전에 관한 정보들은 틀린 것들이 너무나 많이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네이버에서 조어대전을 검색하면 런던에서 “철물상을 하다가 은퇴 후 낚시를 즐기며 문필생활에 몰두했다”는 글을 볼 수 있는데, 은퇴 후 낚시를 즐겼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철물상을 했다는 것도 절반만 맞는 것이기에 잘못된 정보라고 지적할 수 있다.(이유는 뒤에서 설명)

아이작 월튼의 조어대전은 그가 83세가 되던 1676년에 발행된 제5판의 가필(加筆)이 현재 우리가 보는 한글판 조어대전의 원형을 가진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제5판은 그의 낚시제자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쓴 플라이낚시에 관한 내용의 추가가 가장 큰 변화이자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작 월튼이 쓴 초판본은 조어대전이 아니라 송어대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송어낚시에 관한 내용이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이작 월튼이 전하는 말-Study to be quiet”이란 포스팅에서 “조어대전의 말미에 밑도 끝도 없이 적은 ‘Study to be quiet’는 어떻게 해석해야 정확하게 아이작 월튼의 생각을 반영할 수 있을까?”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Study to be quiet란 표현이 진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의 표현이었다.

개인적인 욕심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번역해보고 싶은 것이지만 번역을 위해서는 그가 쓴 다른 책들을 함께 봐야 하고,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영국내전의 역사를 비롯하여 휘그주의와 토리주의 같은 역사관 및 영어의 고어표현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진전이 무척 더딘 형편이다.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생애와 그의 명저(名著) ‘The Compleat Angler’를 번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분명 아니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결과를 얻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오늘부터 대략 10회 정도에 걸쳐서 아이작 월튼의 생애와 그의 저서에 대한 글을 적어볼까 한다.

먼저 첫 번째로 아이작 월튼의 유언장을 소재로 삼은 것은 그를 이해하고 조어대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것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번역한다는 것은 문자로만 나열된 것을 해석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상 수상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겠으며 위에서 언급했던 아이작 월튼이 철물상을 했다는 것이 잘못된 정보라는 것은 추후 자세한 포스팅으로 이어지겠지만 챈서리 레인(Chancery Lane)과 플릿 스트리트(Fleet Street)의 두 곳에 상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작 월튼의 유언장으로 화제를 돌려 유언장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And first, I doe declare my beliefe to be, that their is only one God, who hath made the whole world, and me and all mankinde; to whome I shall give an acount of all my actions, which are not to be justified, but I hope pardoned, for the merits of my saviour Jesus. — And because [the profession of] Cristianity does, at this time, seime to be subdevided into papist and protestant, I take it to be at least convenient to declare my beleife to be, in all poynts of faith, as the Church of England now professeth. And this I doe the rather because of a very long and very trew friendship with some of the Roman Church.

처음에 저의 신앙은 다음과 같은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세상과 저와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한 신이 계시고, 그분께 저의 모든 행동을 속죄할 생각입니다. 저의 지난 행동은 의롭지 않은 것이었지만, 구세주 예수님께 용서받기를 희망합니다. 기독교는 현재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할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적어도 제 신앙의 신조는 모든 점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가 공언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도 길고도 진정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밝히는 것입니다.

월튼은 종교에 관한 난해한 신학적 논쟁을 싫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난해하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사항이다.

이런 그가 유언장을 통해 왕당파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을 통해 우리는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발간한 것은 “은퇴 후 낚시를 즐기며 문필생활에 몰두했다.”고 하는 인터넷의 정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청교도혁명의 시기, 왕당파였던 월튼은 런던을 도망치다시피 떠나야만 했고, 일요일에는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등의 일체의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기였기에 낚시를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는 일은 청교도 정부에 반항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Iz. Wa”란 익명으로 제4판까지 발행하였던 것이며 1676년 제5판에 와서야 본명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이작 월튼이 은퇴 후 낚시를 즐겼다고 말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편으로 끝내려 했으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작의 유언과 관련한 글을 1, 2편 정도는 더 작성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그의 유언장의 또 다른 일부를 살펴보면서 마치도록 하자.

1683년 8월 9일 작성을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수정을 거듭한 끝에 8월 16일에야 서명을 했던 그의 유언장에는 런던에 있는 두 채의 집과 스태퍼드(Stafford)에 있는 조그마한 주택과 윈체스터의 땅을 누구에게 나누어주라는 내용도 있다.

그 중에서 스태퍼드(Stafford)에 있던 작은집(Cottage)과 땅은 스태퍼드 디스트릭터(Stafford District)에 기증하였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지원하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스태퍼드(Stafford)에 있는 월튼의 작은집(Cottage)은 Stafford Borough Council이 운영난을 이유로 2003년에 폐쇄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영국인이 아닌 미국인들이 기금을 모아 운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여 지금도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