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강과 하천이 많은 영국의 중부, 미들랜드에서 성장한 아이작 월튼은 어린 시절부터 낚시를 즐기며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혼 전까지는 꾼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낚시가 취미인 사람으로서 아이작 월튼과 그가 쓴 조어대전(The Complete Angler)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연재를 시작하였는데, 오늘도 포털의 잘못된 정보 하나를 먼저 알아보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네이버에서 조어대전을 검색하면 ‘1655년에 제2판이 출판되었으며 다시 C.코튼이 속편을 1676년에 발행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이작 월튼의 낚시제자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속편을 발행하였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1653년에 초판이 발행된 The Complete Angler는 1655년에 개정증보판인 2판이 발행되었고, 1661년에 3판, 1668년에 4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1676년에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플라이피싱에 관한 내용을 쓰고 아이작 월튼이 가필(加筆)한 것을 제2부로 합본한 5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어대전의 원형을 가진 최초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어디서 생산되고 전파된 정보인지는 몰라도 백과사전이란 이름 아래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아이작 월튼과 청교도혁명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청교도혁명의 시기, 왕당파였던 월튼은 런던을 도망치다시피 떠나야만 했고, 일요일에는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등의 일체의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기였기에 낚시를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는 일은 청교도 정부에 반항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Iz. Wa란 익명으로 제4판까지 발행하였던 것이며 1676년 제5판에 와서야 본명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즉, 아이작 월튼의 낚시에 관한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며, 그의 생애 전체를 종교와 별개로 조망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데, 아이작 월튼과 종교와 관련하여서는 영국내전, 좁게는 청교도혁명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럼,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아이작 월튼과 영국의 약사(略史)를 살펴보고 가자.
1593년 8월 9일 아이작 월튼 탄생
1608년에서 1618년 사이에 런던으로 이주(15~20세)
1620년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필그림 파더스는 미국으로 이주
1626년 12월 27일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
1628년 권리청원
1640년 2월 5일, 47세에 던전(John Donne의 전기) 출간(최초)
1640년 8월 22일 첫 번째 아내 사망
1642년 청교도혁명
1647년 Anne Ken과 재혼
1649년 찰스 1세 처형, 크롬웰 공화정 선포
1653년 조어대전 초판 발행
1660년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1662년 4월 17일 두 번째 아내 사망
1665년 런던 페스트 유행
1666년 런던 대화재 발생
1683년 12월 15일 아이작 월튼 사망
1644년 마스튼 무어 전투(Battle of Marston Moor)에서 왕당파가 패배하자 아이작 월튼은 런던에서의 사업을 접고 Shallowford에 거처를 마련하고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였으며 말년에는 윈체스터에 있는 사위의 집에서 살았다.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낚시를 하면서 글을 쓰는 생활은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영국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대립으로 파괴와 약탈이 벌어지던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을 겪던 시대에 의회파와의 타협을 거부하던 왕당파의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은거하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 참고 인내하라며 보냈던 메시지가 바로 조어대전의 제일 끝에 적인 침묵을 배우십시오(Study to be quiet)라는 표현인 것이다.
쉽게 말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죽어 지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인데 The Complete Angler의 주요 키워드인 낚시친구란 표현이 국교회(國敎會)의 은유적인 표현이면서도 좁게는 몰리, 쉘던, 해먼드와 같은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어대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1662년 아이작 월튼은 ‘The Experience’d Angler or Angling Improv’d’라는 책을 쓴 로버트 베너블즈(Robert Venables)에게 자신도 30년 이상이나 낚시를 해오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1662년이면 그의 나이가 69세일 때이니 30년 전부터 낚시를 했다고 가정하면 그의 나이가 39세인 1632년부터 낚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고, 그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사업의 성공으로 얻은 경제적 안정과 1626년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이작 월튼이 낚시를 한 것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영국은 1628년에 권리청원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청교도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는데 아이작 월튼은 왕당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아이작 월튼은 1626년 12월 27일 33세의 나이로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장모는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가문의 출신이었다.
아이작 월튼은 결혼 전에 존 던(John Donne)을 만나 국교회와 관계를 맺었는데 결혼으로 인해 국교회와의 관계는 결정되어버렸으며 이것은 청교도혁명 당시 아이작 월튼이 런던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자 낚시를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던(John Donne)을 만난 이후로 아이작 월튼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작 월튼이 전하는 말-Study to be quiet’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아이작 월튼은 47세였던 1640년 2월 5일에 전기작가(傳記作家)로서 최초의 작품인 존 던(John Donne)傳을 출간하면서부터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존 던(John Donne)
존 던과 아이작 월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존 던(John Donne)은 1624년부터 1631년에 사망할 때까지 성 던스턴 서부교회(St Dunstan-in-the-West)의 교구신부(Rector)를 맡았고,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1629년부터 1644년까지 이 교회에서 간사를 비롯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존 던(John Donne)의 보좌신부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아이작의 조카 사라 그린젤(Sarah Grinsell)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기 때문에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며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그의 명저(名著)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편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퓨리턴(청교도 :Puritans)을 비난한다고 해서 퓨리터니즘(Puritanism) 자체를 비판한다고 판단해서는 그와 그의 작품해석에 있어서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밝힌 바가 있는 것으로 The Compleat Angler를 직접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다른 책들을 함께 봐야 하고,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영국내전의 역사를 비롯하여 휘그주의와 토리주의 같은 역사관 및 영어의 고어표현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작 월튼이 비판했던 것은 퓨리턴(청교도 :Puritans)들의 타협하지 못하는 편협함과 독선적인 사고, 평화와 질서가 아닌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것이었으며 그는 퓨리턴의 사상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기조차 했다.
이와 함께 역사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사고는 역사가인 에드워드 하이드 백작(Edward Hyde, 1st Earl of Clarendon)과 같은 시각으로 영국내전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스코틀랜드 맹약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역사를 함께 돌아봐야 하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영국내전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생각은 그의 저서 사랑과 진실(Love and Truth)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으며 그는 내전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아이작 월튼은 대단히 관용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지성과 경험을 보탠 다음 형성된 냉철한 시각과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검색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아이작 월튼의 초상화는 제이콥 휘스만스(Jacob Huysmans)가 그린 말년의 모습으로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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