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안과의사이자 소설가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쓴 추리소설의 주인공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는 정작 작가인 코난 도일에게는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코난 도일은 “좀 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글을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으며 특히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역사소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계속해서 추리소설을 쓰기가 싫었던 코난 도일이 출판사에 거절의 뜻으로 “1천 파운드를 주면 셜록 홈즈를 계속 쓸께!”라고 말하자 즉시 “OK!”라고 수락해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된 1887년은 이스트 런던 지역인 화이트채플에서 최소 다섯 명이 넘는 매춘부를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잇따라 살해한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이었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가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는 “유태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휘갈겨 쓴 메모였는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배경이자 대중의 인기를 받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낙후된 수사기법과 신분제도에 따른 수사의 한계로 인해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실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한 물증도 없이 유대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이나 왕족이 범인일 경우에는 아예 사건을 은폐하는 일도 만연하고 있었고, 당시의 경찰들이 주안점을 둔 것은 실제 범인의 체포가 아니라 강력범죄로 인한 민심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도 시민들이 셜록 홈즈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811년 12월, 영국 런던의 간선도로에서 일어났던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인데 이 사건 또한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와 함께 미해결사건으로 남아 있지만 12월 23일 27세의 선원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수감되게 된다.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지었던 사건은 1811년 12월 7일 랫클리프 간선도로 옆의 옷가게에서 주인부부와 생후 3개월 된 아기 및 점원을 살해한 사건과 12월 19일 옷가게 근처의 술집에서 주인부부와 하녀 등 3명을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12월 27일 구치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데 경찰은 그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런던거리를 순회하면서 공포에 떨던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려 하였고 군중들 앞에서 죽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심장에 말뚝을 박아 구덩이에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현재까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진범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당시 랫클리프 간선도로가 지나던 런던의 ‘이스트 엔드(East End)’는 수 천 명의 선원과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많은 이민자들과 유대인, 중국인 등의 외국인들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의 범인으로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이 지목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었고 단지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하는 대중들의 편견 때문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지목된 것이 아일랜드인이었다고 한다.
한편 범인으로 지목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조서에는 “키가 작고 다리를 저는 영국인”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다리를 절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잘못된 수사란 증거가 많으나 이쯤에서 멈추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낙후된 수사기법으로 범인을 잡지 않고, 만들어내고 있던 영국경찰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검찰이 무혐의 처리한 전 법무부차관 김학의 사건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 유괴살인사건이다.
1860년 6월 29일 밤부터 30일 아침 사이에 당시 4세의 어린 나이였던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가 집(Road Hill House)에서 사라진 후 옥외화장실에서 목인 잘린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은 상류층의 가정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위쳐(Whicher)’ 형사는 범인으로 피해자의 누나인 16세의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를 지목하지만 노동자계급인 ‘위쳐(Whicher)’형사가 상류층의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류층은 언론을 이용하여 “아직 16세에 불과한 소녀, 그것도 피해자의 누나가 범인이란 것은 심한 날조”란 여론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자기가 범인임을 고백하였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건은 종결되고 마는데 노동자계급이면서도 상류층의 범죄를 수사하여 진범을 밝힌 ‘위쳐(Whicher)’는 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지만 반면에 영국경찰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887년 11월에 오늘의 주제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되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다음 해인 1888년에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189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인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Four)’은 크게 히트를 치면서 ‘셜록 홈즈’라는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뛰어난 지략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셜록 홈즈’가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에 의해 현대적으로 변한 프랑스 경찰을 동경하여 1829년에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라는 런던 전역을 관할하는 경찰조직을 만들었지만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실망한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런던 경시청(Metropolitan Police Service, MPS)’을 가리키는 애칭 또는 별칭인 환유어로 현재는 공식적으로 ‘뉴 스코틀랜드 야드(New Scotland Yard)’로 부른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로 불리게 된 동기는 초대의 청사가 있던 런던 화이트 홀 플레이스 4번지의 뒷문이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Great Scotland Yard)’ 대로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셜록 홈즈 시리즈뿐만 아니라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곤 하는데 언제나 셜록의 뒷북을 치는 수사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언론의 뒷북을 치고 있는 버닝썬과 관련한 대한민국 경찰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관심거리인 ‘버닝썬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경찰과 검찰이 자꾸만 무능했던 영국의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와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가 범인일리 없다던 영국언론의 모습은 국내 모 언론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이번 기회에 견찰과 떡검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