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는데,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한국경제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코로나 19로 인한 고용불안은 서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데, 낚시용품 회사인 미국의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한다면서 무슨 경제를 논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연재를 마쳤던 세계의 스피닝 릴 번외편으로 미국의 셰익스피어(Shakespeare Fishing Tackle)에 관한 얘기를 적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상생경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모범 케이스가 바로 셰익스피어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스피닝 릴 시리즈 ⑨편에서 소개했었지만 다시 간략하게 셰익스피어(Shakespeare Fishing Tackle)를 소개하자면 지금은 퓨어피싱에서 소유하고 있는 낚시용품 브랜드인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베이트 릴에서 라인을 고루 감을 있도록 해주는 레벨 와인드(level wind)를 세계최초로 상용화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William Shakespeare Jr.)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은 낚시용품이 아닌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William Shakespeare Jr.)와 그의 사업에 포커스를 맞추어 얘기를 해볼까 한다.
1929년~1933년의 대공황 당시 불황이 계속됨에도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William Shakespeare Jr.)는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지 않고 대신에 근로시간을 3~4시간 단축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여의 정상적인 지급이 어렵게 되자 주당 50달러 정도의 주식을 임금으로 지불하였는데, 돈이 급한 직원들은 그것을 내다 팔아 25센트를 마련하였고, 그나마 여유가 있던 직원들은 기다렸다가 급여를 지급받았다.
이처럼 기업과 근로자 간의 상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셰익스피어는 대공황이 휩쓸던 시기에도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계적인 낚시용품 회사인 셰익스피어의 창업자인 윌리엄 헨리 셰익스피어 주니어(William Henry Shakespeare, Jr)는 1869년 9월 21일 미시간 주의 칼라마주(Kalamazoo)에서 태어났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호기심과 자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아버지는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하였으며 그것은 칼라마주(Kalamazoo) 출신으로는 최초의 지원병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제대 후에는 변호사로, 나중에는 은행가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남북전쟁 참전 군인들을 위한 군인공제회인 공화국의 위대한 군대(Grand Army of the Republic)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이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려서부터 셰익스피어는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보이고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다.
19세인 1888년에는 다니던 상점을 그만두고 치과용 드릴을 개발한 조지 그린(George F. Green) 밑에서 일을 배웠으나 1년 만에 다시 그만두고는 카메라의 셔터를 제작하는 회사를 공동으로 창업하여 여러 가지 특허를 취득하였는데 이때 그의 능력을 발휘하여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캐스팅 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조지 그린(George F. Green)
당시의 경제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역에서는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사진관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바람에 셰익스피어의 카메라 셔터 사업은 날로 번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자 오랜 연인이었던 코라 먼로(Cora Monroe Shakespeare)와 1890년에 약혼을 하고 1892년 11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 시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William Shakespeare Jr.)는 레벨 와인드(level wind)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1897년 5월에 특허를 신청하여 1897년 10월 5일에 특허권을 취득하게 된다.
그러나 특허가 있다고 해서 저절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허를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금이 있어야만 했었는데 이런 점에 있어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도 아빠찬스를 활용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은행가로도 활약했다고 잠깐 소개했었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의 아버지는 셰익스피어 중앙은행이란 이름의 은행을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었으며 이런 아버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레벨 와인드(level wind)를 세계최초로 실용화한 릴인 스타일 C(Style C)를 출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스타일 C(Style C)
1897년에는 The William Shakespeare, Jr. Company를 설립하고 4층 창고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한 층에서는 의약품 판매사업을 있었으나 미국의학협회(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허가를 받지 않고 사업을 한 것이어서 접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의약품 판매사업을 중단하면서 생긴 여유자금을 이용하여 월터 마호프(Walter Marhoff)란 사람을 고용하였는데 이것은 셰익스피어란 낚시용품 회사의 발전에 아주 큰 공헌을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월터 마호프(Walter Marhoff)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마호프 릴을 만든 사람으로 같은 마호프 릴이라 하더라도 셰익스피어에 고용되어 개발하기 이전의 제품은 MRC(Marhoff Reel Company)로 표시되어 있고, 이후부터는 SM(Shakespeare Marhoff) 또는 SMP(Shakespeare Marhoff Product)라는 코드가 표시되었다.
그리고 1908년에는 마호프 릴(Marhoff Reel Company)을 통째 인수하게 된다.
이어서 1913년에는 사무실을 이전하고 본격적으로 스포츠용품의 판매를 추진하는데 이런 내용은 다음 기회에 충분히 알아보기로 하겠지만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플루거(Pflueger)와의 미노우에 관한 특허분쟁에서도 승리했던 일화도 자못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낚시로부터 이어지는 스포츠란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서 크게 주목할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생뚱맞게도 1차 대전 동안에는 모터에 들어가는 퓨즈를 생산하고, 이어서 카뷰레터(carburetor)의 제조에까지 뛰어들어 나중에는 벤츠에 부품을 공급하기에도 이르렀던 것은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빗자루를 만드는 회사를 인수하여 캐나다에 6만 달러(현재가치로 150만 달러 정도)어치를 수출하기도 하였고 깡통따개를 만드는 회사를 인수하기도 하였으나 수익성이 나빠 오래지 않아 처분하고 말았다.
뭐 이런 것들은 넓게 보면 기계류 사업이라고 봐줄 수 있으니 그렇다 손치더라도 느닷없이 모피류 사업에 손들 댄다든지 심지어는 여성용 속옷을 만드는 사업에까지 손을 대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호기심에 의한 것 때문만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셰익스피어란 회사와 창업자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거의 책 한 권의 분량은 나올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그의 말년은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에 사망하였는데 그가 죽기 2년 전인 1948년에는 노조의 파업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폭도들이 공장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 급기야는 주 방위군이 투입되기에 이르렀고 1949년 9월에서야 법원의 판결로 파업이 불법임이 인정되었으나 대공황 당시에도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함께 고통을 나눌 정도로 노사간에 신뢰가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로서는 많은 직원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실망하였다고 하며 이에 플로리다의 멜버른(Melbourne)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니어의 사업가적인 능력과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여러 차례의 포스팅을 통해서 자세히 알아본 다음 하겠지만 인생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