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리얼 제조업체인 켈로그(Kellogg’s)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가 1922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바뀌게 되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보다 앞선 켈로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은 마침 바로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태어난 날이다. 1860년 4월 7일 출생한 그는 1930년에 사업에서 번 돈으로 ‘W. K. 켈로그재단(W. K. Kellogg Foundation)’을 설립하였는데 1934년 그가 재단에 기부한 6천6백만 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
켈로그의 처음 회사명에 ‘배틀 크리크(Battle Creek)’란 단어가 들어있는 이유는 의사였던 형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관리하고 있던 미시간 주의 요양원 이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 형제가 태어난 곳이 미시건(Michigan)주의 배틀 크리크(Battle Creek)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내용이지만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뿐만 아니라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함께 근무를 하였다.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그러나 이 요양원이 1866년 9월 5일에 처음 문을 열 때에는 요양소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부건강회복연구소(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란 이름으로 개원하였는데 1902년 화재로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처음으로 요양소(Sanitarium)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1876년부터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소장으로 재임하게 되었고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경리직원으로 근무를 했던 것이다.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
켈로그 형제가 공동으로 설립한 최초의 회사는 1898년에 창업한 ‘배틀 크리크 요양소 건강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Health Food Company)’였고 이것이 1901년에는 ‘배틀 크리크 요양소 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Food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1899년에 혼자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던 회사(Sanitas Nut Food Company)와 합병하여 1908년 7월에 회사이름을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 다시 회사명을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형제간의 갈등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켈로그(Kellogg)’란 회사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을 설립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며 동생이 별도로 1906년에 기업을 창업하게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간의 갈등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동생이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형도 그의 개인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던 회사와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형과 동생은 사이좋게 회사를 공동운영다가 무슨 이유로 결별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맛의 개선을 위해선 설탕을 사용해야 한다.’는 동생의 의견과 채식주의자이면서 금욕주의자였던 형의 ‘설탕은 탐욕을 증가시킴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설탕의 사용을 두고 형제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는 동생에게 요양소에 있는 환자들 외에는 시리얼을 공급하지 말라고 통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동생이 별도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지만 레시피는 동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동생의 회사는 1909년에 이름을 ‘켈로그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Kellogg Toasted Corn Flake Company)’로 바꾸면서 1908년부터 회사명에 ‘켈로그’를 쓰고 있던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된다.
이름도 비슷하고 포장과 내용물까지 유사한 두 회사의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하여 마침내 1920년, 동생이 형을 고소하여 승소하게 됨으로써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결과의 하나로써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는 1921년부터 회사이름에서 켈로그를 빼고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었고 동생의 회사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사명을 변경하고 ‘켈로그(Kellogg’s)’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던 켈로그 형제는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말년에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지만 그의 비서가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90세를 일기로 1943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동생이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욕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바랐던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을 앞두고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새삼 떠오른다.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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