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탐구를 계속하고 있는 한국 바다낚시의 역사에 대하여 올해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낚시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문화를 무조건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전통이 있다면 그것을 계승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우리 고유의 낚시문화와 도구에 대한 역사를 탐구하자면 필연적으로 일본의 낚시문화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일전에 “낚싯대 1칸은 왜 1.8미터일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칸이 1.8미터로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일본의 척관법을 수용한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많은 낚시인들이 알고 있는 찌낚시대의 호수는 사용하는 목줄의 호수를 규격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정확한 근거는 없는 추정에 불과한 것임에도 이 또한 일본의 G사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대나무를 이용하여 낚싯대를 만들었던 역사를 더듬어보면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대나무 낚싯대에서 흔히 명간(名竿)이라고 하는 것은 5.4미터(3칸)의 경우에는 선경이 1.2㎝, 7.2미터(4칸)의 경우에는 1.8㎝ 정도의 규격을 표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과 현재 사용하는 목줄의 호수를 찌낚시대의 규격으로 정하게 된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하여 더 많은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역시나 더디기만 할뿐입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낚시문화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최근에 일본인 하토리 나오타츠(服部直達)가 쓴 책, 낚시자료실(釣りの資料室)에서 섬뜩한 일본의 낚시문화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잠깐만 소개를 할까 합니다.
에도시대의 아와번에서는 영주의 낚시를 도와주는 일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봉건시대의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들로서 허리에는 칼을 차고 영주의 명이 있으면 낚시를 도와주는 일을 했다고 하며 처음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은 규조(久蔵), 토자부로(藤三郎), 세이베(清兵衛)의 3명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15명으로 증원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그들의 낚시문화에서 자랑하기를 사무라이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약 7미터(3칸 5척)의 낚싯대와 도구를 들고 왕복 수십 리 길을 걸어 낚시를 다녔다고 하면서 그것은 체력의 증진과 심신의 단련을 위한 활동이었으며 이를 일컬어 낚시의 도, 즉 조도(釣道)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와번 소속으로 영주의 낚시를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사무라이들은 조과가 없을 경우에는 할복과 참수까지 각오해야만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진정한 도(道)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에도시대의 영주들이 하던 낚시를 일컬어 흔히 다이묘낚시라고 하는데 채비부터 미끼를 달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하고 고기가 물었을 때 단지 낚싯대를 들어 올리는 것만 영주가 할 뿐으로 대단히 사치스런 행사의 하나였다고 하며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영주가 고기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상에 지친 심신을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낚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기를 잡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어디 겁이 나서 낚시를 다닐 수나 있겠습니까?
책에는 영주가 물고기를 잡지 못해 할복하거나 참수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없는 점으로 볼 때 다행히 무고한 인명의 희생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내년의 힘찬 도전을 기약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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