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선거가 끝났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있으며 그의 자녀들 또한 선거결과의 승복을 두고 의견충돌을 빚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았다.

서부에서 바이든에게 참패하고, 자녀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트럼프를 보면서 나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떠올리게 된다.

링컨과 트럼프는 모두 공화당 소속이란 것과 탄핵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내가 링컨을 소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였다.

물론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재선에 성공했던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러나 1865년 3월 4일, 제17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취임연설을 했던 링컨은 1865년 4월 14일의 피격으로 다음 날인 4월 15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이 뒤를 이어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최초로 탄핵재판을 받은 기록을 남겼으나 무죄가 선고되어 파면을 면할 수는 있었는데 트럼프 또한 미국대통령으로 세 번째로 탄핵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노예제도를 없앤 인물로만 알고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가족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면 결코 행복했던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링컨 대통령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만 보더라도 그들의 가정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는 그의 저서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 것은 그의 결혼에 비교하면 비극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부부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남편의 암살을 곁에서 목격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은 장남을 제외한 3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고 장남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던 아픔을 겪었는데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1년 뒤인 1882년 7월 1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음 날 사망하였다.

링컨 대통령 부부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만이 유일하게 성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었고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유일하게 링컨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로버트 토드 링컨

 

둘째 아들인 에드워드(Edward Baker Lincoln)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인(死因)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

 

아마도 링컨과 그의 아내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겨다 준 것은 셋째 아들인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862년 2월 20일이면 몹시 추운 겨울이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난방이 잘되지 않았을 그때는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이 내쉬는 마지막 숨이 하얀 연기처럼 퍼졌을 것이다.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백악관에서 지켜보았을 링컨 부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윌리엄 링컨이 죽고 난 뒤 3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의 슬픔도 커서 암살당하기 전까지 셋째인 윌리엄이 잠들어 있는 오크힐 묘지(Oak Hill Cemetery)를 꾸준히 찾았다고 하며 결국에는 아들과 함께 기차로 운구되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의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월레스 링컨

 

막내아들인 넷째, 토마스 태드 링컨(Thomas Tad Lincoln III)은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했다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백악관을 나와 그의 나이 18세 되던 1871년 7월 15일,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당시 시카고에 있던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그 뒤 스프링필드의 가족묘지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토마스 태드 링컨

 

다시 링컨 대통령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돌라오면, 링컨 대통령은 22세에 고향인 켄터키주의 호젠빌을 떠나 일리노이에 정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스프링필드에서는 변호사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가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자 스프링필드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링컨기념관협회(National Lincoln Monument Association)를 조직하고 기금모금에 나서 링컨의 가족묘지(Lincoln Tomb)를 완성하였다.

1874년, 조각가 라킨 골드스미스 미드(Larkin Goldsmith Mead)가 디자인한 기념비의 완성과 함께 링컨 대통령은 카타콤(catacomb)의 중앙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에 안장되었다.

 

불행했던 링컨 대통령의 삶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아 완전한 안식을 얻지도 못했는데 MBC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던 것처럼 사후에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MBC 서프라이즈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1877년의 일이라고 나오지만 정확한 것은 그보다 1년 전인 1876년의 일이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가 이끌던 시카고 아일랜드의 범죄조직은 위조화폐를 만들고 있었는데 기술자의 한 명인 벤자민 보이드(Benjamin Boyd)가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일리노이 주립교도소에 수감되자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

그래서 케널리는 벤자민을 석방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조직원인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를 시켜 링컨의 시신의 훔친 다음 몸값으로 현금 20만 달러와 벤자민의 사면을 요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76년 당시 링컨 대통령의 시신은 스프링필드의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오크리지 묘지는 마을에서 3㎞나 떨어진 곳에 있는 관리인도 없는 시골묘지에 불과했다.

게다가 석관은 도난방지장치는커녕 시멘트도 아닌 소석고(plaster of Paris)로 봉인되어 있었고 석관이 안치된 방은 자물쇠 하나뿐이었기에 범죄자들은 쉽게 침입할 수는 있었으나 관을 들어올리지 못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검찰국 위장요원, 루이스 스웨글스(Lewis Swegles)의 권총이 실수로 발사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틀 후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는 체포되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링컨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묘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던 존 캐럴 파워(John Carroll Power)는 멘붕에 빠지고 만다.

전문 도굴꾼도 아닌 아마추어들이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면 당시에 성행하던 전문적인 시체도둑(body snatchers)들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한 그는 링컨 대통령의 시신이 매장된 위치를 옮기고 비밀에 부친다.

그리고 링컨의 장남인 로버트가 시멘트로 봉인하기까지 35년 동안이나 링컨 대통령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석도 없이 쓸쓸히 묻혀있어야만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링컨의 인생을 과연 누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