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날은 전 세계적인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갔던 날이기도 하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제2차 대전과 같은 전쟁은 인류 역사에 다시는 있어선 안 될 비극이지만 전쟁이 시작된 날, 전쟁을 끝내는데 공헌한 플라스틱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플라스틱이 이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포스팅은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의 기사를 참고로 작성한 것이란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얘기를 시작할까 한다.

플라스틱은 1898년 독일의 화학자 한스 폰 페치만(Hans von Pechmann)이 발견한 것이지만 1933년 영국의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 임페리얼화학산업)란 회사의 직원이었던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발견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35년에 ICI의 다른 직원인 마이클 페린(Michael Willcox Perrin)에 의해서 생산방법의 특허를 취득하게 되었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날, 위닝톤(Winnington)에 있던 ICI의 공장은 플라스틱의 생산에 들어갔다.

 

1933년 3월 24일,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은 가스 액화 혼합물을 이용한 고압실험을 하던 도중, 기구의 압력이 떨어지면서 누수가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 장비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흰색의 왁스 상태의 고체 물질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폴리에틸렌이었다.

그러나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분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폴리에틸렌(Polythene)도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에릭 포셋(Eric Fawcett)은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하였고 1935년에는 캠브리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고, 회사에서 지원을 철회하는 바람에 포셋도 마침내 다른 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플라스틱을 세상에 선보이는 쪽을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포셋의 뒤를 이어 마이클 페린(Michael Perrin)이란 젊은 연구원이 고압연구를 계속해서 진행하게 되었고 그는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이 진행했던 연구를 기초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935년 12월 19일, 성공적으로 몇 그램(g)의 폴리에틸렌을 생산하게 된다.

 

마이클 페린(Michael Willcox Perrin)

 

마이클 페린(Michael Perrin)은 그가 생산한 샘플을 회사에 보고하여 평가를 받았는데 결과는 당시 케이블의 피복용으로 사용되던 구타페르카(Gutta Percha)와 유사하지만 훨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얻는다.

그리고 100톤을 주문받은 ICI는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만들게 되는데 공장이 완공되어 가동에 들어간 날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산되기 시작한 플라스틱은 레이더의 동축케이블의 절연체로 사용되면서 영국군은 레이더를 탑재한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었고 독일의 야간공습을 봉쇄함은 물론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데 큰 공을 세운 플라스틱이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기 때문일까? 이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