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코로나 19에 관한 뉴스로만 넘쳐나는 대구에서 지난 2일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1928년 5월 17일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15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끌려가 북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가 2005년에야 고국에 돌아와 대구에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이제 생존해 계시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18분, 아직도 사과 없는 일본과는 달리 이와 유사한 피해를 끼친 독일정부는 작년에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에게 일시불로 2,500유로를 보상하기로 결정을 한 일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정부가 나치로부터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한 금액이 지금까지 우리 돈으로 95조 정도가 되니 이번에 보상하는 금액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과는 달리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사과와 보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일의 모습을 일본도 조금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야기의 제목인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는 2000년 9월 7일 개봉되었던 미국의 다큐멘터리 “Into the Arms of Strangers: Stories of the Kindertransport”의 한국어 제목인데 원제에 있는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어린이 수송작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와 떨어져 일본군의 위안부로 생활해야 했던 피해자 할머니들처럼, 유대인 어린이들도 부모와 헤어져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던 점에 있어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로 동원된 것이었다면 유대인 어린이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 구출되었던 것이라는 큰 차이가 있는데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인 11월 10일 새벽까지 나치대원들은 독일 전역에서 수만 개에 달하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 개의 시나고그(유대교 사원)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깨어진 수많은 유리창의 파편들이 크리스탈처럼 반짝였던 것에서 연유하여 이날의 만행을 ‘수정의 밤(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유럽의 유대인들 중에서 어린 자녀를 두었던 사람들은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의 유대인들이 나서서 영국정부에 유대인 어린이들의 입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재증보증을 서겠다는 약속을 한다.
한편 영국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의회에 제출할 법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후견인이 있는 17세 이하의 유대인 어린이들만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독일도 이런 이민(탈출)을 허용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200여 명의 유대 어린이들이 1938년 12월 2일 영국의 하리치(Harwich)에 도착을 하게 되었으며, 1940년 5월 10일, 75만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공격함으로써 국경이 폐쇄되었던 5월 15일의 하루 전인 5월 14일에 마지막 수송선이 74명의 어린이들을 태우고 네덜란드의 에이마위던(IJmuiden)을 떠남으로써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1만여 명의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종료되었다.
독일이 이와 같은 유대인 어린이들의 이민 형식의 탈출을 용인해주었던 것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정책이 자발적인 이민에서 강제추방으로 바뀌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 과정에서 발벗고 나서 노력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 여성인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는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의 추방을 담당하고 있던 홀로코스트의 전범이자 유대인 박해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직접 만나 600명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다음 1938년 12월 10일,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6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태우고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
이렇게 탈출한 600명의 어린이들 중 100명은 30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네덜란드의 훅반홀란트(Hoek van Holland)에 내렸고 나머지 500명은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박해를 벗어났다고는 해도 어린이들이 타국에서 부모도 없이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는 운 좋게 위탁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어린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적국의 독일인으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영국가정으로 위탁되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수용소나 호스텔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18세가 되었을 때에 영국군에 입대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를 통해 영국으로 왔던 유대인 어린이들 중에서 1천 명 정도가 입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어린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가족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 밥 커크(Bob Kirk)와 결혼했던 한나 쿤(Hannah Kuhn)이란 여성으로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는 가방을 들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어린이들의 조형물이 있는데 조형물의 제목은 “삶으로 가는 기차–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뜻하는 “쥬게 인 다스 레벤–쥬게 인 덴 토드(Züge in das Leben – Züge in den Tod)”이다.
이 조형물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인 독일의 조각가 프랑크 마이슬러(Frank Meisler)가 영국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 설치한 것으로 조형물의 색상과 표정에서 어둡게 표현된 어린이들의 운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끝이 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품을 떠나 타국의 위탁가정에서 생활했던 유대인 어린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계속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함은 물론이고 기존의 보상금과 중복하여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한다고 한다. 더 길게 적으면 희망 없는 국내 정치권의 얘기까지 거론할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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