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싯줄

낚싯줄의 역사-나일론 라인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낚싯줄의 변천사에 대해서 알아볼까 하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인 한국의 낚시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너무도 부족하여 정리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국 낚시의 역사에 대한 집대성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작은 결실은 만들고 싶은 것이 희망사항입니다.

이런 과정의 하나인 낚싯줄의 변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서로 나일론 낚싯줄을 먼저 다루는 이유는 나일론이 대한민국의 경제사와 성장사에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재벌기업들의 잘못된 갑질행태와 근로자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아직도 구시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사건도 들어있는 것이 나일론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낚싯줄의 역사는 말총과 800여 년 전 남송시대에 천잠(天蠶)으로부터 실을 뽑아 초산에 담갔다가 건조시킨 것을 사용했던 것이 시초였습니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던 고려의 주 수입품목 중의 하나가 비단이었던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고려시대에 이런 천잠을 이용한 낚싯줄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추론은 해보지만 고증할 수 있는 자료는 아쉽게도 아직은 구하지를 못했습니다.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낚싯줄을 사용하다가 바로 나일론 낚싯줄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는 레이온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낚싯줄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에 약하고 천연비단에 비해서 강도도 떨어져 낚싯줄을 만드는 소재로는 사용할 수가 없어서 제품화 되지는 못했던 것이었지요.

굳이 낚싯줄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하지 못한 레이온을 언급한 이유는 많은 낚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도레이(TORAY)란 상표로 낚싯줄을 생산하고 있는 일본의 도레이사의 원래 사명(社名)이 동양레이온(東洋レーヨン)이었으며 1970년에 사명을 도레이(東レ)로 변경한 것을 많은 분들이 모르기도 할뿐더러 한국 나일론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원진레이온 사태”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1993년에 폐업한 ‘원진레이온’은 세계최대의 이황화탄소 중독이라는 국내 최대의 산업재해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데 1964년 화신그룹의 박흥식이 일본의 동양레이온으로부터 중고기계를 들여올 때 일본은 이황화탄소 중독증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때라 좋은 기회로 여겨 판매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인용: 한겨례-원진레이온의 자살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나일론 낚싯줄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하버드 대학의 화학과 교수이던 월리스 캐로더스와 듀폰의 연구팀이 나일론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1935년이고, 일본에서 동양레이온이 나일론 생산에 성공한 것이 1941년이며 “은린(銀鱗)”이란 상표의 나일론 낚싯줄을 최초로 생산한 것이 1947년인 것에 비해 한국에서 최초로 나일론이 생산된 것은 1963년이니 일본과는 시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고 이로 인해서 사용하던 낚싯줄도 자연스럽게 일본 동양레이온의 제품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일본의 동양레이온, 즉 현재의 도레이사는 한국의 나일론 역사와도 또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때 한국나이롱(주)가 처음으로 생산한 나일론 원사의 이름이 바로 ‘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이었고 줄여서 ‘코오롱(KOLON)’이란 이름으로 불렀으며 현재의 코오롱이란 기업명을 가지게 된 동기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일본의 동양레이온이 나일론 낚싯줄을 개발한 것이 당시에 얼마나 크게 인기를 끌었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광고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1947년 나일론의 투명화에 성공하고 이것을 낚싯줄로 만든 동양레이온에서는 홍보를 하기 위한 광고를 낚시잡지에 게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광고는 단 한 번으로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만드는 즉시 모두 판매가 되었기 때문에 광고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비록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라고는 해도 국내에 나일론 낚싯줄이 수입된 것이 언제이며, 누가 소개를 한 것인지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과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한 것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증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역사적 사료(史料)를 찾는 개인적인 노력은 계속되겠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많은 제보를 부탁드리면서 다음 시간에는 천년이 지나도 분해되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가진 플로로카본(플루오르 카본) 라인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낚만 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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