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2010년 9월 2일 영국 데번 주의 토키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하루가 지난 89세 노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에일린 넌(Eileen Nearn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던 경찰이 유품에서 발견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으로 인해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네임 “더 로즈”로 활약하였던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2개의 장미라고 하면 바로 에일린 넌(Eileen Nearne)과 도쿄 로즈 중의 한 명이었던 일본여성 “아이바 토구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가 있어서 스파이들에게 붙는 코드명에 로즈란 단어가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에일린 넌(Eileen Nearne)은 게슈타포의 모진 고문에도 죽음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수용인원 12만 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는 6만 명이 숨진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는데 오늘은 그녀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2001년에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샤롯 그레이”의 실제 모델이었으며 독일비밀경찰이 현상금 5백만 프랑을 걸면서까지 잡고 싶어 했던 인물인 “낸시 웨이크(Nancy Wake)”와 같은 SOE 소속의 스파이였습니다.

 

영화 “샤롯 그레이”의 한 장면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는 일명 처칠의 비밀부대라고도 불리며 2차 대전 당시 1940년 7월 22일에 조직되어 1946년 1월 15일까지 운영되었고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세계 17개 지역에 지부를 운영하였던 특수작전부대였는데 그녀는 낙하산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침투하였고 체포될 때까지 105차례나 주요정보를 영국으로 송신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21년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에일린은 1923년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덕분에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언니 재클린(Jacqueline)과 오빠 프란시스(Francis)와 함께 SOE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남매는 서로 SOE요원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니 재클린(Jacqueline)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막내 에일린과 그녀의 언니 재클린을 영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자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코틀랜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한 다음 이전의 포스팅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에서 귀족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한 부대를 이은 “응급의용간호부대(FANY: First Aid Nursing Yeomanry)”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와 언니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곧 SOE에 가입하게 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서로는 SOE에 가입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에 침투하게 되어 언니 재클린은 자금과 무기 및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되고 에일린은 무전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4년 3월 2일, 에일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지부장이었던 프랑스인 “쟝 사비(Jean Savy)” 휘하에서 근무하던 두 명의 요원은 어린 나이의 에일린에게는 너무 위험하니 돌아갈 것을 바랐지만 여의치 않아 그녀를 데리고 와서 런던과의 무전교신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4월이 되고 지부장 “쟝 사비(Jean Savy)”는 독일이 새로운 V1로켓을 개발하여 영국으로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남겨진 에일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게슈타포에 의해 동료들이 하나둘 체포되는 와중에도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영국에 정보를 전달합니다.

1944년 7월 21일,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에일린은 비밀문서를 불태우고 무전기를 숨기는데, 서류는 모두 없앴지만 무전기가 발각되어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랗게 끌려간 에일린은 자신은 프랑스인이며 단순한 사업상의 내용을 주고받은 것이라 항변하지만 게슈타포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비롯한 심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영화 피메일 에이전트의 한 장면

 

모진 고문에도 자신이 스파이였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게슈타포는 할 수 없이 전쟁포로가 아닌 일반인 수용자의 신분으로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 보내는데 당시 전쟁포로들의 옷에는 아래와 같이 X자를 써넣어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수용소에 수감된 에일린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고문은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그녀는 비밀을 지켰고 1944년 12월에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마르클레베르크(Markleberg)”로 이감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에일린은 다른 두 명의 프랑스인과 함께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게 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마는데 자신들은 프랑스 출신의 자원봉사자임을 설득하여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당에 은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은 그녀들을 종탑에 숨겨주었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에일린은 1945년 4월 15일, 미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발견되어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비밀리에 투입되었던 여성 SOE요원은 모두 39명이었다고 하는데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영국으로 귀환한 에일린에게 프랑스정부는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을 수여하고 영국정부는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

 

그러나 에일린은 심한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런던에서 그녀의 동생과 함께 생활하다가 1982년, 동생이 죽자 토키(Torquay)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에일린이 살던 토키의 아파트

그녀는 1층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정부의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역사학자 “마이클 풋(Michael Richard Daniell Foot)”이 1966년에 발간한 책(SOE in France)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녀의 생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가 2010년 9월 2일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쓸쓸할 수도 있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영국 재향군인회(The Royal British Legion)의 주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치러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의 이웃에게는 그저 고양이를 사랑하는 할머니로만 여겨졌던 에일린 넌(Eileen Nearne)을 생각하면 게슈타포의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그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장례식의 모습

 

부디,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낚만 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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