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을 통해 알아보는 선조들의 낚시문화

고전(古典)을 통해 알아보는 선조들의 낚시문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으로는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북송시대의 문인 소식(蘇軾)이 쓴 동파전집 23권 강교(江郊)에 나오는 아래의 구절을 들 수 있다.

의조망어(意釣忘魚), 악차간선(樂此竿綫), 優哉悠哉(우재유재), 玩物之變(완물지변)이 그것으로 “고기는 잊고서 낚시만 생각하며, 낚싯대와 낚싯줄만 즐기노라. 조용하고도 한가로이, 사물의 변화를 즐겨 구경하노라.”라는 말이다.

이는 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낚시인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오늘은 우리의 고전 속에 나오는 선조(先祖)들의 낚시문화를 알아보도록 하자.

■ 조선왕조의 시조회(始釣會)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19년, 1759년 3월 10일에 내원(內苑)에서 모두 54명이 모여 꽃구경을 하며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가 네 마리를 잡았고 물고기를 잡을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잡은 고기는 다시 놓아주었으며 이 행사는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고 한다.

원문의 내용을 일부분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경인(庚寅)/소제각신(召諸閣臣), 상화균어우내원(賞花鈞魚于內苑).

여러 각신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꽃구경과 낚시를 하였다.

上曰(상왈). 여자설치내각이래(予自設置內閣以來), 범재시직자(凡在是職者), 시동가인(視同家人), 금일지회(今日之會), 당용가인지례(當用家人之例). 각신자제(閣臣子弟), 개허여연(皆許與筵).

임금이 이르기를 짐이 규장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직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집안사람처럼 생각하였으니, 오늘의 모임도 마땅히 집안사람의 준례를 적용하여 각신의 자제들도 모두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허락하노라.

정조가 만든 규장각(奎章閣)은 송나라의 천장각(天章閣)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천장각에서 매년 봄과 여름에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했던 것을 따온 것이다.

 

■ 문종은 낚시동호회의 회장?

예종실록 3권에는 예종 1년이던 1469년 1월 22일 당시 세자의 신분이었던 문종이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서 낚시를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문종은 조선왕조의 낚시동호회를 만들었던 것일까?(ㅎ)

원문: 시문종위세자(時文宗爲世子), 야여제군(夜與諸君), 조경회루지(釣慶會樓池), 소사복관원형입견(召司僕官元亨入見).

 

■ 성종도 릴낚시를 즐겼을까?

“낚시용 릴의 역사”에서 잠깐 살펴보았던 조거(釣車)는 원래 조어거(釣魚車)라고 하는 것으로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송시대의 화가 마원(馬遠)이 그린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낚시에 릴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놓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도 성종(成宗)이 쓴 소상팔경(瀟湘八景)에써 조거(釣車)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半碎收漁網(반쇄수어망): 반쯤 부서진 어망을 거두며

長歌揮釣車(장가휘조거): 크게 노래하고 낚싯줄을 당긴다.

乾坤無特緖(건곤무특서): 세상에 특별한 마음이 없어

風月自然斜(풍월자연사): 바람과 달에 자연히 기우는도다.

■ 최초의 선상낚시 실족사

안전한 낚시는 시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쓴 점필재집(佔畢齋集)에는 선상낚시를 하다 실족하여 익사한 한권(韓卷)이란 분의 기록이 있다.

원문: 한권위인불기(韓卷爲人不羈). 유문무재(有文武材). 역대간(歷臺諫). 만위소산군사(晩爲所山郡事). 승주조어익사(乘舟釣魚溺死).

한권은 됨됨이가 무엇에도 얾매이지 않았으며 문무를 겸비하였는데 대간(臺諫)의 직을 역임한 뒤 만년에 소산군사가 되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가 익사하였다.

 

■ 선조들도 밑밥을 사용하였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35에는 궁궁이를 사용하여 낚시를 한 모습이 엿보인다.

책에 따르면 “궁궁자석민하어(芎窮自昔憫河魚)”라는 구절이 있는데 궁궁(芎窮)은 천궁(川芎)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동물을 통한 약리작용실험에서 중추신경계통에 작용하여 진정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식물로 냄새가 좋아 선조들은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물속에 뿌리고 고기가 모이게 하여 낚시를 했다고 한다.

 

■ 농어낚시의 달인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전기의 남효온(南孝溫)이 쓴 시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는 농어낚시의 달인에 관한 아래의 내용이 나온다.

세종 24년과 25년이던 1442년과 1443년에 한 남자가 천민복장을 하고 벼랑 아래에서 낚시를 하였는데, 그가 잡은 것은 모두 농어였다. 그는 잡은 고기를 음식과 바꾸었고, 이튿날 또 잡으면 다른 집으로 가서 역시 그렇게 했으나 굳이 제값을 다 받지는 않았다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물으면 “나는 농어 아비다.”라고 하였다.

원문: 世宗壬戌(세종임술),癸亥年間(계해년간). 有一男子(유일남자). 위천자복(爲賤者服). 조어어석벽하(釣魚於石壁下). 기소조필로어(其所釣必鱸魚). 득칙지왕인가이역식(得則持往人家以易食). 명일우득측우지타가역여시(明日又得則又之他家亦如是). 불필진기직(不必盡其直). 인문기명측왈(人問其名則曰). 아로어부야(我鱸魚父也).

 

■ 생선회를 즐겼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조선중기의 학자 권호문(權好文)이 쓴 송암집(松巖集)에는 권호문이 24살 되던 1555년 7월 5일에 물고기를 잡아 회를 뜨고 국을 끓여 퇴계(退溪) 선생과 함께 먹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안동시 도산면 온계천(溫溪川) 하류에 있는 섬처럼 큰 반석(盤石)인 청음석(淸吟石)에 올라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니 혹시 쏘가리를 드셨던 것은 아닐까?

원문: 칠월오일 선생승황묵지가 소계상조어청음석 호호문등거망이어득 일반혹회혹갱요찰방급온계사오인공향(七月五日 先生乘黃墨之暇 溯溪上釣於淸吟石 呼好文等擧網而漁得 一盤或膾或羹邀察訪及溫溪四五人共餉)

7월 5일, 퇴계 선생께서 글을 읽으시는 도중에 여가를 내어 온계천을 거슬러 올라 청음석에서 낚시를 하셨다. 호문 등을 불러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시기에, 한 소반의 분량을 잡은 다음 회를 뜨고 국을 끓여 찰방과 온계사람 4~5명을 불러 함께 먹었다.

 

■ 낚시터의 음주는 반드시 절제를…

특히 밤낚시를 하는 경우에 가벼운 음주를 즐기는 낚시인들도 있는데 물가에서는 안전을 위하여 지나친 음주는 반드시 삼가야 하는 일이지만 선조들도 낚시를 하면서 술을 즐겼던 모습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홍여하(洪汝河)가 쓴 목재집(木齋集)을 보면 이웃이 가져온 술을 마시며 함께 낚시를 한다는 “파주동린래조반(把酒東隣來釣伴)”이란 내용이 있고 조선후기의 학자 조임도(趙任道)가 쓴 간송집(澗松集)에는 아래의 원문과 같이 아예 동이채 술을 마시는 모습이 나온다.

원문: 세우기두주일준(細雨磯頭酒一罇)-가랑비 내리는 낚시터에서 술 한 동이를 비웠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고전에 등장하는 낚싯바늘에 관한 이야기를 “찌낚시 이야기-찌의 역사”를 통해 잠깐 소개했던 남구만이 쓴 조설(釣說)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