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연구 프로그램으로 탄생한 아그레가트(Aggregat)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V2 미사일이라 부르는 A4 미사일이다.

V2 미사일의 V는 독일어 베르겔퉁스바펀(Vergeltungs waffen)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보복(vergeltungs)무기(waffen)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집합체라는 뜻의 아그레가트(Aggregat)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던 A4 미사일이 보복무기 2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개발되던 당시 나치독일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이 미사일의 개발과 함께 역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개발의 주역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5개의 독일육군 무기실험장의 하나인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에서 미사일을 개발하였는데 “이곳은 너와 네 동료들에게 가장 완벽한 장소”라고 그의 어머니가 권했던 장소라고 한다.

그러나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은 관련 정보를 입수한 폴란드 저항군의 제보에 따라 1943년 8월 17일과 8월 18일 이틀 동안 600여기의 연합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연합군의 폭격은 가능한 많은 연구원들을 죽이기 위해 연구시설이 아닌 주거용 건물을 표적으로 삼았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노동자 500여명을 포함하여 모두 700여명이 사망하자 V2의 개발은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인근의 지하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네뮨데(Peenemünde) 박물관에 전시된 V2 모형

 

1944년 9월 7일 독일육군의 포병 제444중대는 파리를 향해, 9월 8일에는 런던을 향해 V2 로켓을 발사했는데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발사기지에서 쏘아 올린 V2 로켓은 런던까지의 320㎞ 거리를 5분간 비행하여 9월 8일 오후 6시 43분 치즈윅(Chiswick)에 떨어져 13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V2 미사일의 명중률은 극도로 저조하여 런던 시내에만 떨어지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V2 미사일은 심리적으로 런던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연합군이 V2 미사일을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발사 전에 파괴해야만 했지만 V2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동식 발사를 할 수 있었으므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합군으로서도 발사 전에 포착하여 파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위협적이었던 V2 미사일은 연합군의 공격이 아닌 우리가 먹는 감자 때문에 나치독일이 더 이상 운용할 수 없는 웃픈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직경 1.65m, 길이 14m의 V2 로켓의 기체 절반은 연료탱크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용하는 연료의 75%은 에탄올이었으며 이것은 감자를 증류하여 생산하고 있었다.

 

바이오매스 에너지의 연구가 활발한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1리터의 에탄올을 만들기 위해서는 12㎏~15㎏의 감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5,200리터의 용량을 가진 V2 미사일의 연료탱크는 75%인 3,640리터의 에탄올을 채워야 했고 이것을 생산하려면 현대의 기술로도 40톤 이상에 이르는 양의 감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채소인 감자는 1인당 소비량 2위의 토마토가 10㎏인 것에 비해 그보다 6.5배가 많은 1인당 65㎏을 해마다 소비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미사일 연료를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지금보다 기술이 떨어졌을 당시에는 40톤보다 훨씬 많은 감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1944년 이후에는 동부전선으로부터 소련군이 진군해오면서 동유럽에서의 감자 수확량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V2 미사일은 쏘고 싶어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